칼럼 및 논설

팥고물시루 떡[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가]

교육정책연구소 2021. 2. 18. 11:15

팥고물시루 떡

김미

 

나는 떡보, 떡순이임이 분명하다. 자다가도 떡 소리가 나오면 벌떡 일어난다. 뭐라고 해도 맛있던 떡 맛은 따로 있다. 배꼽시계의 독촉에 시계를 바라볼 즈음, 이웃의 누군가 접시에 담아 온 김이 모락모락 나고, 손으로 집었을 때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떡이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던 것 같다. 손에 쥔 떡이 줄어들면서 허기가 사라져가는 느낌은 지구가 채워져 가는 만족감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한번 푸지게 해 나눠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떡 방앗간에 전화했다. 찰떡 고물은 무엇으로 해야 맛이 있겠냐고 했더니 어느 용도냐고 물었다. 생일 떡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나 많이 하는 거냐고. 물론 나누어 먹을 사람이 많아서라고 했다. 이번에도 가족 누구에게도 떡을 해야겠다고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말만 하면 남편도 아들들도 말릴 것이다. 누가 떡을 먹는다고, 시큰둥할 것이다. 기어코 이번만은 떡을 많이 해서 나누고 싶었다. 그 떡은 내 가족만 먹기 위한 거라기보다는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만드는 음식이었다. 떡은 좋은 일, 슬픈 일로 찾아오는 이웃들을 대접하기 위한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어릴 적 어머니도 우리 가족만 매번 얻어먹을 수 없으니 이번 생일 떡은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말씀을 곧잘 했다. 방안에 자리를 깔고 무쇠 솥뚜껑만 한 떡판을 다독였다. 콩고물을 뿌리며 접시로 잘라 몰랑거리는 떡을 접시에 담아 고샅의 집마다 돌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떡은 옆집 친구 엄마가 생일이라며 접시에 두 겹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팥고물 멥쌀 시루떡이었다. 어찌나 먹고 싶던지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조금씩 손가락으로 뜯어 먹다 보니 절반이나 먹어 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맛이 있었냐며 마저 먹으라고 했다. 그 떡이 잊히지 않아 아무리 만들어 보아도 그 기억의 맛은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추억의 맛으로 남아있다. 떡은 내가 해서 먹는 떡보다 좋은 일에 조금씩 나누어 주는 떡이 맛이 있었다.

설 대목이면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가래떡을 하기 위해 불린 쌀을 이고 방앗간으로 갔다. 떡 방앗간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다 삼켜 버렸다. 길에 늘어선 함지박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떡 기계는 두 줄기의 가래떡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마치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고장 난 수돗물 같았다. 그 가래떡을 아주머니는 가위로 싹둑 잘랐다. 긴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뜨거운 떡밥을 막 주먹으로 쥐여 준 떡 맛도 잊을 수 없다. 방앗간 바닥은 질척해 발도 시렸다. 그 지루한 시간도 입안으로 들어오는 떡 맛에 녹아들었다. 그 맛이 없었다면 어린 내게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한 동네에서 몇십 년을 살다 보니 가구마다 여인네들의 나누는 손의 크기를 짐작하게 된다. 나와 같은 무렵에 결혼한 빈이 엄마는 동네에서도 명이 날 만큼 손이 큰 사람이었다. 무엇을 해도 적은 양은 못했다. 남의 집에 나눌 때도 차고 넘치도록 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홀시아버지를 모시면서도 자신은 못 써도 시아버지의 주머니가 꽉 차도록 용돈을 드리고 시댁 형제들에게도 나누는 손길이 크더니 이웃들로부터 사랑도 넘치도록 받았다. 처음에는 나이, 가정환경, 학력까지도 비슷하건만 왜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만 관심을 쏟고 사랑 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오랫동안 그녀 삶의 근황을 지켜보니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큰 손도 타고나는 것인지 나는 그렇지 못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들로부터 사랑도 품앗이라고 여기니 나에게서 모든 것이 비롯됨을 깨달았다.

마을 회관에 몇 사람은 있어야 할 시간인데 한 분만이 있었다. 왜 혼자만 계시는 것이냐고 물으니 살구나무집이 팥고물 떡을 했다는 거다. 그 집 떡을 한 것과 사람들이 없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겠냐는 듯이 말똥거리며 쳐다보았다. 그 집에서 떡을 했으니 먹으러 오라고 해서 다 몰려갔다는 거다. 왜 그럼 가지 않았느냐 했더니 얼마 전에 사소한 일로 언쟁을 했는데 먹으러 오란다고 가겠냐고 한다. 그 시간이 한참 시장기가 도는 시간이라 팥고물 떡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그렇다고 따로 왜 오지 않느냐며 전화가 없는데 갈 수는 없는 형편이다. 혹시 싶어 누군가 가져오지도 않을까 생각을 하며 귀를 밖에 두고 발걸음 소리만 기다렸다. 한 떼의 사람이 몰려갔으니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몫이라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한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났다. 벌떡 일어나 손을 보니 빈손으로 들어온다. 떡은 맛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떡을 해 오는 길에 만나서 떡을 다 먹었다고 한다. 군침만 삼켰다. 나는 언쟁한 일도 없건만 왜 나만 부르지 않는 것일까? 하는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스름 저녁이다. 허기진 배와 소외당한 외로운 마음으로 터벅터벅 집에 들어갔다. 진즉 집에서 밥이나 해 먹을 걸 하고 뒤늦은 후회까지 들었다. 분명 가족들은 배가 고프다며 밥 독촉 할 텐데. 가족들의 표정이 밝다. 얼른 밥해야 한다고 서두르는 내게 밥 필요 없단다. 살구나무집에서 떡을 맛있게 해 와서 실컷 먹었다고 한다. 그토록 먹고자 했던 팥고물 떡이다.

 

살구나무집의 동네 전체 떡을 나누는 손길을 생각해 보았다. 이웃을 위해 나누는 손길은 사랑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누는 마음에는 나름의 따뜻한 셈이 있었다. 코로나로 다들 힘든 시기이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만은 가까이라고 외친다. 한 마을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나누고자 하는 마음의 크기를 다 헤아릴 수 있다. 이번에는 나도 생일을 빙자해 마스크를 쓰고 떡을 나누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쓸쓸한 집의 표정이다. 인기척에 힘겹게 문을 밀고 얼굴을 내밀었다. 눈물겹도록 반가워했다. 그 모습이 새봄에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화사했다. 팥고물 떡을 나누고 내 어머니의 말랑거리는 쑥떡의 맛을 간직하고 집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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