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길에서 쓰는 편지[미래교육신문 조기호 시]

교육정책연구소 2020. 10. 15. 10:20

조기호

 

길에서 쓰는 편지

 

길이 무척이나 멉니다.

참으로 황막荒漠하고 힘든 길입니다.

비탈들이 가로놓인 길입니다.

 

공기방울처럼 많은 날들을 떠돌면서

오늘은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울고

잠결에도 황소가 우는 그런 곳까지 왔습니다.

 

별들이 유난히도 맑은 마을입니다.

낮은 처마마다 하나씩 불빛을 가진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그러나

하룻밤을 묵으며

늦도록 몸을 뒤척이며,

한사코

고요히 마음을 누일 수 있는

그런 아늑한 시공時空이 그리운 길입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머무는 것인지요,

어깨를 뿌리치고

서로 발등을 밟고 기어오르는 넝쿨처럼

종일토록 걸음만 무성한 이 길

 

부디 해량하올 일은

뉘우침도 깨달음도 없는

먼 머언 길에서

사는 일이 이렇듯

겹겹의 허물만 더하는 까닭입니다.

 

 

 

-------------------- 【시작메모】 -----------------------

 

삶을 ‘여정旅程’이라 하는 이들이 많다. 사는 일을 하나의 ‘여행길’로 빗댄 표현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우리의 생애生涯란 ‘태어남’으로부터 출발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행(?)이라 여기는 생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길이 누구나 다 같지가 않아서 저마다의 삶 또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을이 깊어가는 저녁 무렵, 창밖을 스쳐가는 소슬 바람의 소리를 들을 때나, 혹은 낙엽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쓸쓸함으로 지나온 길에 대한 회억回憶에 젖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났던 모든 시간과 인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때는 깨닫지 못했던 감사와 사랑과 그리고 꾹꾹 참아야만 했던 실의와 낙망에 대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정좌하고 마주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삶의 여정旅程이란 고단하고 피곤했던 길도, 가파르고 막막했던 길도, 목마르고 힘들었던 길도, 그리고 평온하듯 고요했던 길도 아니었다. 즉, 그 길들이 지닌 굴곡屈曲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곤고한 길들을 어떻게 걸어왔는지의 과정이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쫓기듯 바삐 걷는 날도 있었고, 헐떡이며 숨 가쁘게 오르던 날도 있었으며, 쓰러질 것만 같았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아니 아직 끝나지 않은 이 길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길은 나만의 편리를 위하여 놓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한 보따리 등짐을 지고서 아무런 불평 없이 그저 끄덕끄덕 길을 걷는 조랑말을 떠올려본다…….

무릇 삶의 여정旅程이란 한낱 주어진 길이 짊어지는 걸음의 무게가 아니라 길 위에서 내가 짊어져야 하는 숱한 뉘우침과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보는 것이다. 붉게 타는 저녁놀 속에서 오늘은 하룻밤을 묵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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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3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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