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호
독작獨酌
붉게 충혈된 하늘을 향해 술을 따른다.
혀를 꽉 물고 진창에 쓰러졌던 바람이 꼬리를 세우고
쭈뼛한 지느러미를 가진 구름들이 몰려올 무렵
나는 뜻밖으로
대담해지고 싶어진다.
절망을 보듬고 싶어진다.
길들여지지 않고 자유롭게 굴러다니고 싶어진다.
물살처럼 휘몰아쳐서 낭떠러지에 이르는 눈물이 되고 싶어진다.
외로움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문득 떠나고 싶어진다.
풀벌레처럼 햇살들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잠자리처럼 쓸쓸하게 맴돌지 않도록
풀잎처럼 주저앉아 혼자 울지 않도록
갈꽃처럼 흔들리는 모습 보이지 않도록
반팔차림 허수아비처럼 우습지 않도록
낙엽처럼 뒹굴지 않도록
그저 세상의 모든 뒷모습을 붙들고
멋쩍은 악수 대신 한 잔의 술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슬픔은 누구의 탓이 아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였을 뿐,
누구도 깨닫지 못하였을 뿐,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란 없었다.
꿈들이, 눈물들이, 좌절과 낙망의 문장들이
그리고 너와 나의 연분緣分들이 모두 그러하였으므로
한사코 울면서 떠나가야 할 까닭은 정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붙잡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쥐었던 한 움큼의 세월이 허망하게 빠져나간
빈 손바닥 같은 가을을 등지고
허위허위 떠나가는 세상의 뭇 걸음들이
더러 깊은 골짝 어느 눈보라에 싸늘하게 묻힐지라도.
나는 잔을 높이 들고서 소리죽여 운다, 아니
그 무엇을 위하여 떠나는지도 모르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떠나야하는
끝닿을 데 없이 어리석고 숭고한 이별들을 배웅하기 위하여
조용히 밤을 기다려 술을 따른다.
부디 떠나서 훨훨 날아오르라고……,
무성한 날개를 가지고도 끝내 새가 되지 못한 나뭇잎들에게
그리고 한 번도 스스로를 위해 노래하지 못했던
귀뚜라미의 뜨거운 울음 위에
-------------------- 【시작메모】 ----------------------------------
가을이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창밖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길 가의 나뭇잎들 또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본다. 추수가 끝난 농촌의 들녘이 그러하듯 가을이 더러 허전하고 황량한 까닭은 ‘비우고 떠나감’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삶의 한 부분(또는 한 시절)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런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마감(정리하고 마무리함)한다는 것은 이제 곧 그 자리로부터 떠나야 하는 일이 될 터이므로 불현듯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왠지 쓸쓸해지거나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보고도 싶은 것이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어떤 것들을 남겼는가, 아쉬움은 없는가,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떠나갈 수 있겠는가? 느닷없이 골몰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떠오르는 생각들마다 한결같이 다 아쉽고 후회스런 생각들뿐이다. 그렇게까지 욕심 부리지 않았어도 될 걸,
좀 더 너그럽게 살 걸, 더 많이 사랑하며 지낼 걸…하는 푸념을 붙들고 지난날의 잘못과 허물들에게 감히 잔을 권하며 한번쯤 용서라도 구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가을이 깊어갈 것이다. 단풍과 낙엽과 서늘바람에 실려 이제 그동안의 시간들도 제 각각의 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갈 것이다. 바라건대, 그 길 위에서 기꺼이 우리와 함께 했던 모든 일들에 감사드리며 더불어 그러한 인연들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감히 술 한 잔을 따르며 부탁드리오니 가을이여, 떠나가는 모든 걸음들이여, 그 간의 허물들 모두 용서하시고 항상 건강하시며 부디 즐겁고 평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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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2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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