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술의 맛, 공부의 맛[미래교육신문 최성광기고]

교육정책연구소 2021. 4. 15. 11:19

최성광(광주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교육학 박사)

 

술의 맛, 공부의 맛

나는 술을 잘 못한다. 타고난 몸이 술을 잘 받지 못해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고 뜨거워져서 동석자들에게 민망할 때가 많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술이 맛있다고 느껴지지도 않아 즐겨 마시지도 않는 편이다. 나는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의식을 특징으로 하는 X세대에 속하지만, 우리 세대의 술 문화는 기존 관습을 철저히 이어받았다. 그래서 남자는 술이 세야 하고, 술로 승부를 내어 서열을 정하거나, 날을 새워 술 마시는 것이 낭만이라 여기던 문화 속에서 대학을 다녔다. 선배들이 따라주는 술은 무조건 다 마셔야 하고, 술에 취해 몸이 힘들어도 모임이 끝날 때까지 절대 자리를 뜨면 안 되었고, 모두의 체력과 돈이 떨어질 때까지 2차, 3차, 4차를 외치며 가끔은 날을 새우기도 했던 문화 속에서 나는 정말 힘들게 살아왔다.

내가 처음 술을 마신 건 고3의 치열한 삶을 목전에 앞둔 1995년 2월말이었다. 일찍이 까진 친한 친구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자며 자율학습이 끝나고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6대째 내려오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한 번도 부모님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삶을 살지 않았던 내게 그 제안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것은 내 자아와 이성이 꿈틀대며 그 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신앙과 보수적 관념의 껍질이 파괴되었던 날이었다.

한편 첫 음주 후 나의 술인생은 그야말로 흑역사의 연속이었다. 못 먹는 술을 분위기 상 먹게 되니 한 잔 마시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기 일쑤였다. 과거 술자리는 그 모임이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무조건 술을 강요하던 문화가 강했다. 상급자와의 술자리는 물론이고 편한 친구들과 만나도 술을 억지로 먹이고 강요했던 분위기 속에서 나는 술이 너무 싫고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에 대한 생각이 많이 관대해졌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술자리에서 몸과 마음이 술에 단련된 것인지, 아니면 술이 갖는 묘한 매력을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됐건 모임 자리에 맥주 한 잔은 가볍게 마실 정도는 되었다. 내가 이렇게 바뀐 것은 술에 대한 자율성이 생기면서이다. 예전 나에게 술은 강요 속에 마셔야 하는 강박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선택해 마실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이제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도 없고, 2차, 3차 술자리를 이어가는 것은 서로 부담스럽게 느끼는 문화가 조성되면서이다. 최근에는 코로나를 겪으며 오히려 편안한 술자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자율성은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결과를 낳는다. 미국에 동일하게 이주한 한인과 흑인들의 생활수준이 왜 다른가를 자율성의 관점에서 해석한 연구가 있다. 자발적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미국사회에서 자율성을 갖고 삶을 개척하지만, 노예제 등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흑인들은 자율성을 상실한 채 미국사회의 하위계층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율성은 인간의 삶과 행위에 매우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자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교사와 학부모는 지원하고 기다려야 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모든 꽃은 피는 시기가 다르며, 큰 그릇은 오래 기다려야 완성된다. 현재 학제에 따라 아이들을 다그치고 학습시키는 것은 자율성보다 강요와 억압으로 일관하게 된다. 다만 자율성은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자율성을 통해 술의 맛을 아는데 20년이 걸렸듯,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아 자율적으로 공부의 맛을 알기까지 기다리고 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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