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광(광주광역시교육청 장학사, 교육학 박사)
한국 사립학교의 뿌리
) -->우리 사회에서 사립학교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사립 대학 및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해 최근에는 사립유치원까지 이슈의 중심에 섰다. 사립학교에 대한 문제가 터질 때 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사립학교의 공공성과 자주성 논쟁이다. 사립학교는 개인 또는 법인이 설립한 학교이기 때문에 학교의 운영권과 재산권 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교육이라는 공공재를 다루는 공공의 기관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왔다. 이에 2회에 걸쳐 사립학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현재의 논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교육이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학(官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육은 사설기관 또는 개인적인 사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교육의 영역은 사상, 학문, 군사 등 국가의 체계를 세우는 영역부터 의학, 예술, 제철 등의 기술 영역까지 그야말로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영역을 담당해 왔다.
근대 들어 학교라는 제도가 생겼고 사교육의 형태도 사립학교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사립학교는 건학이념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이 달랐고 공립학교보다 더 많은 다양성과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물론 학교 운영에 따른 예산 비용은 건학 주체 또는 학생들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운영이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갑오광무개혁 이후 사립학교는 급격히 늘어났다. 선진 개화파들은 외세침탈과 봉건제 혁파를 위해 대중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사립학교 설립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후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 서양 선교사 및 민간 선각자들에 의해 사립학교는 지속적으로 설립되었다.
고종 또한 서구 열강의 침탈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이를 위해 갑오광무개혁을 실시하고 학무아문(현재의 교육부에 상당)을 설치했다. 이후 운영의 어려움을 겪거나 국가에 필요한 성격의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로 편입하는 등 사립학교를 비롯한 대중교육에 역점을 둔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속에 사립학교 건립은 점차 확산되었는데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한 이후 인가 받은 학교 수만 2,250개에 달할 정도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사립학교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여겨지며 대거 설립되었다. 특히 당시 관립학교는 일제의 탄압에 대부분 폐교 되거나 변질되었지만 사립학교는 계몽과 종교교육이라는 표면적 이유로 유지되며 그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일제의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사립학교가 탄압 받으며 그 기세가 위축되었다. 전체학교 대비 사립학교는 1919년 68.5%에서 1945년 17%로 급감하게 된다. 특히 민족의식과 구국운동 성향이 강한 사립학교는 다수가 폐교 되었고, 일제 식민교육 등을 유연하게 수용한 사립학교들만 유지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의 성향과는 별개로 일부 사립학교 지도부는 친일세력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이렇듯 사립학교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 교육의 한 축을 맡아 나라의 번영과 독립을 위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다음 호에는 해방이후 사립학교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현재의 공공성과 자주성의 논란에 대해서도 논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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