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안시성전투[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교육정책연구소 2024. 6. 11. 17:00

박 철 한

중국 땅을 거쳐 백두산을 여행한 한국 사람이라면 국제적으로 백두산이 중국에 위치한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으리라. 물론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백두산을 가로지르니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백두산의 북쪽과 남서쪽 측면은 장백산으로 불리는 중국 땅이지만 최고봉이 위치한 남동쪽 측면은 엄연히 북한 땅임에도 국제적으로 백두산이 완전한 중국의 산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2000년대부터 시도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도 문제다. 동북공정이란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를 말한다. 그 핵심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명목을 내세워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태껏 중국학자들도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여기지 않았다는데 수나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한 여러 차례의 고구려 승전역사를 애써 감추려 했다는 것이 그 반증이란다. 만약 고구려를 중국역사로 여겼다면 결코 그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애써 감추려 한다는 고구려의 승전역사 중에서도 당 태종(이세민)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안시성전투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안시성전투에 관한 기록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 태종의 이십만 대군이 644년(보장왕 4년)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집권했으므로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연개소문은 즉시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이 이끄는 십오만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처참하게 패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에 투항하였다. 따라서 초기에는 당나라 군대가 파죽지세로 개모성 등 여러 성을 함락하고 645년 4월에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와 당나라 국경부근의 아주 작은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불과 수천의 군사로 당나라의 이십만 대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성 주위를 포위하고 돌을 날리는 포차와 성을 부수는 충차 등을 총동원하여 많게는 하루 예닐곱 차례씩이나 기를 쓰며 공격했어도 안시성은 끄떡없었다. 당나라 장수 이세적은 분을 삭이지 못하며 ‘성이 함락되면 성 안의 남자들을 모두 땅에 묻어버리겠다.’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안시성의 저항은 더욱 거셀 뿐이었다. 내부에서 ‘안시성을 포기하고 더 안쪽에 위치한 오골성을 공략하자’라는 의견도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을 둘러싼 공격이 소용없자 당나라 군대는 성벽보다 더 높은 곳에서 공격하려고 꼬박 두 달 동안 엄청난 인력을 투입하여 토산을 쌓았는데 공격에 활용되지 못하고 무너졌다. 토산이 무너진 원인까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어떻든 당나라의 작전은 실패했다. 오랫동안 헛된 공격만을 거듭하며 지쳐가던 당나라 군사들은 토산까지 무너지자 전투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결국 군량도 부족한데다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요동지방에서 군대를 더 주둔시키기 힘든 상황임을 판단한 당 태종은 안시성을 공격한지 석 달 만에 군대를 철수했다.』

이처럼 안시성전투는 당나라 역사에 커다란 흠집을 내며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당나라 군대가 공격을 하다하다 실패하고 처참한 꼴로 퇴각한 것이다. 그러고도 당나라에서는 마치 당 태종이 안시성의 성주와 군사들을 가상히 여기며 아량을 베풀고 물러간 것처럼 기록했다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퇴각과 상대에게 아량을 베푸는 차원에서의 물러섬은 분명 다르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당나라의 얄팍한 붓놀림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현무문의 변) 즉위하였으나 중국인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기며 그가 집권한 시기를 ‘정관의 치세’라고 한다. 그 까닭은 23년간 재위하면서 안으로는 위민정책을 폈고 밖으로는 북방의 돌궐과 서남방의 토번을 정복하고 멀리 서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당나라를 이슬람제국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만큼은 주위의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당나라와 대립각을 세워 당 태종의 눈엣가시였음에도 끝내 정복하지 못하고 안시성전투 4년 후인 649년(51세)에 죽었다. 야사에는 그가 화병으로 죽었으며 안시성에서 양만춘의 화살에 한 쪽 눈을 잃었다고도 하고, 또는 눈에 상처가 났을 뿐이며 화살을 맞지는 않았다고도 한다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십만 대군과 막대한 물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고립무원의 작은 성에서 석 달이나 고생하고도 이내 실패한데다 한 쪽 눈까지 다치고 물러갔다면 화병을 앓을 만한 치욕이었으리라.

당 태종의 치적은 대부분 충신이었던 ‘위징’의 생전에 이뤘다고 할 수 있는데 643년(고구려 원정 1년 전)에 위징이 죽자 이후로는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당 태종은 “위징과 같은 현자가 없어 고구려 원정을 말리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라고 되뇌며 후회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좌절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으면 숨을 거두면서까지 태자에게 “다시는 고구려로 쳐들어가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당연히 거기에는 안시성전투에서 패한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4년간의 당 태종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안시성전투가 아니어도 당 태종에게는 고구려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당나라 건국 이전이었던 612년에 수양제의 백십삼만 대군이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크게 패하였고 613년과 614년의 연이은 원정도 실패하여 수나라가 민심을 잃었다. 더구나 그 기회를 타고 자신이 스무 살 때인 618년에 아버지 이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건국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신이 청소년 시절에 수나라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이긴 나라였기에 그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안시성전투에서 간담이 서늘했을 당태종이니 고구려를 생각할 때 어찌 황기끼지 않았으랴. 어쩌면 그는 “고구려원정을 계속하다가는 수나라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으로 몸서리쳤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사(正史)에 고구려 안시성 성주였던 양만춘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지만 645년 안시성전투의 승리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방심하면, 전통적으로 무예를 숭상했던 고구려의 그와 같은 승전 기록들이 음충맞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묻힐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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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철 한 중국 땅을 거쳐 백두산을 여행한 한국 사람이라면 국제적으로 백두산이 중국에 위치한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으리라. 물론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백두산을 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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