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품앗이[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교육정책연구소 2024. 5. 21. 10:37

박 철 한

아침부터 끄느름하더니 이내 봄비가 내린다. 소나무들이 생명수를 마시며 미소 짓는데 삼백예순날을 별러 눈부시게 꽃단장을 한 벚나무는 시무룩하다. 궂은 날씨에 대여섯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비옷으로 무장하고 논에서 토란을 심고 있다. 꽃샘추위에다 가랑비까지 내리니 하나같이 쌍그런 모습들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가서 품삯이 얼마냐고 묻자 예수남은 아낙이 말한다. “품삯이라니요, 품앗이니까 이런 날씨에 일을 나왔지요.” 하긴 그렇다. 만약 품앗이가 아니라면 그 날씨에 품삯을 받고 일할 사람이 없었으리라. 임금노동이 대부분인 오늘날에 용케도 품앗이 관경을 보니 적잖이 반갑다.

품앗이는 촌락에서 노동의 교환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공동노동을 말한다. 조직상으로 보면 농가상호간에 편의와 이익을 주고받는 호혜의식(互惠意識)이 제도화되어 형성된 협동체계라고 할 수 있다. 어원적인 의미는 노동력을 말하는 ‘품’과 ‘앗다(일해주고 일로 갚게 하다)’에서 비롯된 ‘앗이’가 결합된 민속어휘로서 ‘노동력에 대한 갚음’의 뜻이 내포되어있다.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인 품앗이는 작업의 종류와 시기에 관계없이 농가에서 자가 노동력만으로는 부족한 작업을 할 때 수시로 이루어졌다. 특히 예전의 손모내기는 써레질을 하고 하루이틀 사이에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3일 이상 지나면 논바닥이 단단하게 굳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너른 논의 경우 가족끼리 모내기를 하다보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하루에 끝내기 위해 부득이 놉을 얻거나 품앗이를 했다.

같은 일이라도 모내기는 물기가 없는 곳에서 하는 일보다 더 힘들다. 무논인지라 계속 서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품앗이는 주로 농번기인 모내기 때나 또는 추수 때 서로 하게 마련이어서 일의 종류를 두고 상호간에 불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특별한 규정이 없이 농가스스로의 양심에 맡겼어도 상대보다 노동력에서 큰 차이가 나는 품앗이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또한 일이 서툴거나 매끄럽지 못하다 하여 불평하지 않았으니 거기에는 우리민족의 협동정신과 유연함이 옹골차게 배어 있다.

품앗이의 근본적인 가치는 인간의 노동력이 모두 대등하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상대방의 노동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이해득실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인력에 대한 평등의식 외에도 의리, 부조의식 등이 깔려 있다. 따라서 사람과 일소의 품앗이는 일소 한 마리에 대하여 한 사람이 하루 이상으로 갚기도 했으나 사람끼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노동력이 똑같이 평가되었다. 이는 상호간의 이해심을 필요로 하며 만약 이해득실을 헤아리고 노동력을 따져 그 능력대로 일하는 시간을 가감하여 책정했다면 이 땅에 품앗이가 정착하지 못했으리라.

“여럿이 가는데 섞이면 병든 다리도 끌려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여럿이 길을 가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받아 개개인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니 거기에도 품앗이의 필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다섯 농가가 각각 자기 논밭에서 5일간씩 일하여 끝마치는 것보다 함께 모여 하루에 한 농가씩 해결하는 것이 어떨까? 그렇다면 여럿이 모여 세상사 시시껄렁한 얘기도 나누며 보다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로 잘하는 일을 나누어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니 분업의 효과로 훨씬 쉽지 않으랴.

갈수록 품앗이가 줄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모내기와 수확의 기계화로 농번기 때 사람의 일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품앗이를 하고 있으며 일소 대신 농기계품앗이까지 등장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일손이 필요한 경우에도 순수 인력교환인 품앗이보다 임금노동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와 환금의식이 팽배하여 합리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는 탓이리라. 품앗이를 하며 서로 두터운 정을 나눌 기회가 예전보다 줄어든 오늘날이니 그만큼 이웃과의 관계도 서먹해지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농번기에 여럿이 품앗이로 일을 하다가 들녘에서 새참을 먹는 정겨운 관경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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