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떳떳한 실속[미래교육신문 박철한수필]

교육정책연구소 2024. 4. 16. 09:17

박 철 한

천하만사를 처리함에 있어 실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일 것이다. 실속이란 “군더더기가 없는 실지의 알맹이가 되는 내용”을 이르니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것을 알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체면 때문에 실속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유교의 영향으로 실속보다 체면을 더 소중히 여겼다. 특히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은 유교윤리를 표준으로 하여 절의(節義/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청백(淸白/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 염치(廉恥/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등이 사회기강의 핵심을 이뤘기에 그와 같은 의식이 더욱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일찍이 우리나라가‘동방예의지국’으로 일컬어졌던 이면에는 유교윤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나친 도덕성 추구는 물질적 가치와 욕망의 현실성이 무시되며 실속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염치를 버리면서까지 실속을 챙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의 양반계층은 글이나 읽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통념이었으며 그것 말고도 양반체면이라는 게 있었기에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생계유지를 위해 대장간 등 궂은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러니 개인의 삶은 물론 국가발전 측면에서도 실속이 있었을 리 없다. 그런데 만약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이 그게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양반계층도 유교윤리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떳떳하게 실생활에 필요한 일을 했을 것이기에 오늘날 우리의 과학문명은 지금보다 훨씬 발전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실속보다 체면을 더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다. 곧 조선시대 초기부터 유교윤리에 근거한 체면 중시 사회가 아니라 실속을 지향하는 사회였더라면 아무래도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오늘날 애경사 행사장마다 눈에 잘 띠는 곳에 필수적으로 진열되는 것이 화환이다. 원래 화환은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시대부터 종교의식과 축제 때 사용되었고 글자 그대로 둥근 모양이었으며 그 의미가 영예 또는 축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화환의 형태는 물론 의미도 훨씬 다양해졌다. 그런데 화환이 많을수록 행사주최자나 상주의 위신이 서는 것처럼 인식되는 사회통념과 보내는 사람의 자기 과시욕과도 맞물려 있어서인지 필요이상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화환은 한 번 쓰고 버려지는지라 다다익선(多多益善)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행사 주최자의 입장에서 볼 때 화환은 행사장을 장식할 만큼의 일정량이면 족할 것이며 그 이상은 허례허식(虛禮虛飾)과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을 뿐 실속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행사 주최자나 상주의 입장에서 화환을 그만 보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으랴. 그 때문인지 요즘에는 화환 모양의 틀에 꽃 대신 쌀을 올려놓는‘쌀 화환’이란 게 있단다. 아마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축하 화환 대신 쌀 화환을 보내는 기부 문화가 확산되는 모양이다. 쌀 화환이 꽃으로 장식된 화환보다 결코 화려하지는 않겠으나 받는 입장에서는 더 실속이 있으리라.

퇴직을 코앞에 두었을 때의 일이다. 일터 관내의 90대 노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를 치르게 된 고인의 자녀들이 뜻을 모아 근조화환 대신 쌀 화환을 받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례기간 동안 모인 쌀이 10kg용 40포대와 20kg용 6포대 등 총 520kg이었다는데 장례를 치르자마자 고인의 자녀대표가 그 모든 쌀을 면사무소로 싣고 왔다. 그러더니“한번 쓰고 버리는 근조화환 대신 쌀을 받아 어려운 이웃이나 독거노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 쌀을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함께 슬픔을 나눈 조문객 분들과 화환 대신 쌀을 보내며 좋은 일에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필자는“귀한 쌀을 기부해주신 고인의 자녀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고귀한 뜻을 깊이 새겨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으시는 독거노인, 다자녀 가구 등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며 그 쌀을 받았다. 결국 시중가격으로 백만 원이 훨씬 넘을 그 쌀은 기부자의 뜻대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달되었다.

장례식장의 필요 이상으로 많은 화환은 조문객들의 눈을 만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너절하게 진열되어 행사를 방해하기 일쑤인데다 행사가 끝나면 버려야 한다. 그러니 행사장을 장식할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화환의 경우 쌀이 훨씬 더 실속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더구나 본인이 챙기는 실속이 아니라 소회된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실속이니 누구에게나 떳떳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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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한 실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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