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건물사이로 책을 펴든 소녀상이 외롭다. 운동장 한편에는 등나무가 주렁주렁 꽃단장을 하고 먼지 쌓여 사위어가는 나무의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운치 있게 어우러진 등나무의 파란 잎은 자줏빛 꽃무늬를 수놓은 여인의 치마폭과도 같고, 늘씬하게 뻗어 오른 밑둥치는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팔등신의 각선미를 보는 듯하다. 폐교 된 어느 시골학교 교정의 고즈넉한 전경이다.
등나무 아래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저만치 담 너머에서 우거진 칡덩굴이 산들바람에 나탈대며 살근거린다. 순간 저 칡덩굴이 금방이라도 담을 넘어 등나무와 뒤얽힐 것만 같은 환상에 젖었다. 일이 뒤얽히어 풀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는 갈등(葛藤)의 어원이 칡과 등나무이기 때문이다.
칡과 등나무는 모두 콩과의 덩굴식물들이다. 칡은 팔월에 자주색 꽃이 피며 줄기의 속껍질을 섬유로 쓰고 뿌리는 갈근이라 하여 녹말을 만들거나 약으로 쓴다. 등나무는 봄에 자주색이나 흰색의 꽃이 피는데 길게 뻗어 오른편으로 감아 올라가는 줄기는 수공예품 재목으로 쓰이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칡과 등나무가 갈등의 어원이 된 것은 둘 다 세력이 매우 강하여 어느 쪽에서도 양보하지 않고 서로 감거나 때론 감기기도 하며 뒤얽히기 때문이다. 등나무를 집에 심으면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는다는 속설도 갈등의 어원과 관계가 있다.
덩굴식물들은 연약하게 낭창거리면서도 꼿꼿이 서서 자라는 식물들보다 생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 거기에는 다른 종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그들만의 오묘한 이치가 숨어있다. 덩굴식물들은 주로 햇볕이 잘 들지 않은 낮은 곳을 뻗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보니 키가 큰 식물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가지 재주를 부여받았다. 그 중 하나가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재빨리 뻗을 수 있도록 매우 빨리 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키가 큰 식물들을 감고 올라가는 재주로써 모두가 햇볕을 잘 받고 자라기 위해서다. 만약 덩굴식물들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재주마저 없었다면 키가 큰 식물들의 그늘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덩굴식물들의 그와 같은 재주가 다른 식물들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다. 덩굴식물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는 덩굴에 칭칭 감겨 부대끼다가 결국 꼭대기까지 덮인 채 햇볕을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은 그 골이 어지간히 깊었던 모양이다. 식물의 이름에서 조차도 그 갈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다. 여뀌과의 일년생 덩굴식물인 ‘며느리밑씻개’라는 풀이 있다. 그 덩굴에 어쩌다 할퀴기라도 하면 살갗에 상처가 나고 쓰릴 정도로 잎과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많이 나있는 풀이다. 그런데 며느리밑씻개라는 풀이름이 매우 특이하다. 며느리는 누구나 다 아는 단어라 하더라도 밑씻개는 또 뭐란 말인가? 밑씻개는 용변을 보고 사용하는 화장지를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그렇다면 가시가 더덕더덕 나 있는 그 잎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그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다음 유래가 흥미롭다.
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일을 하던 며느리가 용변을 보러 간다며 근처 풀밭으로 갔다. 볼일을 다 본 며느리가 밑을 닦으려고 주위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풀이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어렵게 시어머니께 부탁을 하였다.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이었다면 부드러운 풀잎을 뜯어다 주었으련만 그렇지가 않았는지 시어머니는 하필 가시가 돋은 풀잎을 뜯어다 주었다. 며느리는 할 수 없이 시어머니가 뜯어 준 풀잎으로 처리를 하였는데 그때부터 그 풀을 며느리밑씻개라 부르게 되었단다. 그와 같은 이름은 짓궂은 시어머니가 특히 강조된 유래의 내용으로 보아 어쩐지 며느리들의 입장에서 부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 며느리들을 미워하는 시어머니의 속내가 표출되어 그렇게 불렸을 수도 있어 며느리밑씻개라는 풀이름에는 고부(姑婦)간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세상에는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겪는 개인갈등에서부터 정당이나 노사 간에 겪는 단체갈등까지 여러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갈등의 어원인 칡이나 등나무는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무조건 감고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칡이나 등나무처럼 자신은 상대를 감으며 뻗어나가려고 하면서도 상대에게는 소나무처럼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자신이 상대를 감으려 하면 상대 또한 덩굴식물에 감겨 죽고 마는 소나무와 같은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같이 감으려 들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니 스스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뻗으려고 용을 쓰면서도 상대에게만 양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인간에게 없다면 갈등도 있을 리 없다. 곧 사람이 칡이나 등나무를 닮고서야 그 사람은 끊임없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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