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한
까치밥
드넓은 과수원에 새를 막는 그물이 덮여있다. 사과를 쪼아대는 까치를 막기 위해서다. 그물 값도 문제지만 높은 사과나무 위에 그물을 씌우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으리라. 주인에게 다가가, 방조망 값에다 설치하는 노력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까치가 조금 먹더라도 그대로 두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손사래를 친다. 까치가 잘 익은 사과만 귀신같이 골라 쪼아대는 통에 성한 사과가 하나도 없다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과농사 못 짓는단다. 주인의 말과 표정 속에 까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까치와 까마귀는 조류 분류학적으로 같은 과에 속한다. 그런데 까마귀라면 모를까 까치가 과수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다니 뜻밖이다. 예로부터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며 까치가 많이 모여들어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길조로 여겨지던 새였다. 까치가 길조로 여겨지게 된 이유를 짐작해보면 우선 새의 모습이 날씬하고 예쁘며 “쪽, 쪽, 쪽”하는 힘차고 빠른 울음소리가 밝고 명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까치가 운다는 표현보다 노래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뜻이다. 까치가 많이 모여들어야 풍년이 든다는 말도 과일이나 곡식 등 먹을 것이 많은 곳으로 까치가 모여들기 마련이니 당연하다. 요즘 보기 어려운 까마귀는 몸 전체가 검정색으로 까치와는 달리 흉조로 알려진 새다.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아침에 울면 아이가, 낮에 울면 젊은이가, 오후에 울면 늙은이가 죽을 징조라고 여겼다 한다. 그토록 불길한 징조로 여긴 데에는 ‘깍, 깍’ 하며 길고 느리게 내는 소리가 음산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기 때문인 듯하다. 노랫소리라기보다는 울음소리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까마귀는 불길한 새가 결코 아니다. ‘반포지효’라는 말은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본초강목’에 의하면 ‘새끼가 어미를 먹여 살리는 데는 까마귀만한 놈도 없다’하여 이름도 인자한 까마귀란 뜻의 자오(慈烏)라고 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다고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라는 조선 초기 이직의 시조도 까마귀가 흉조가 아님을 대변한다.
설 하루 전 날인 음력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날이라고 한다. 윤극영 선생의 '설날'이라는 동요에도 나오는 까치설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단다. 먼저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해하려 하였는데 까치, 쥐, 돼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다. 그런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그 날을 기념하지만 까치는 기념할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설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정설은, 예로부터 정월초하루를 ‘한설(큰설)’, 섣달그믐을 ‘아치설(작은설)’이라 했는데 '아치조금(음력22일 조금)'을 경기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 하듯이 아치설이 까치설로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북출신으로 서울에서 살며 경기지방 언어에 영향을 받은 윤극영선생이 1927년에 작사 작곡한 동요‘설날’이 나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쓰였다는 설이다.
예전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수가 감나무다. 요즘 과수원의 감나무들은 전정을 하고 수형을 조절하여 나무의 키가 낮으므로 손쉽게 감을 딸 수 있다. 그러나 예전 시골의 감나무들은 심어놓고 그대로 수십 년을 자란 것들인지라 매우 크고 높아서 감을 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나무가 워낙 높다보니 기다란 대나무 끝에 주머니를 달고 그 안으로 감을 넣어 따곤 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장대 끝을 반으로 쪼개 약간 벌려놓고 그 사이로 가지를 넣어 꺾어서 따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감을 딸 때 어른들이 반드시 지키는 일종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다 따지 않고 두세 개씩 남겨두는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까치밥이라 하였다. 모든 새들이 다 먹을 수 있도록 기왕이면 ‘새의 밥’이라고 하면 좋으련만 그 많은 새들 중에 하필 까치밥이라니 그 점이 특이하다. 거기에는 그 감을 다른 새보다는 까치가 먹고 기쁜 소식을 많이 전해주기를 바라는 소박하고 정겨운 마음이 담겨있었으리라.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다 마음속에 있다던가. 예전의 까치밥을 남겨 두던 시절이라고 까치가 감을 쪼아 먹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예전의 감나무는 단지 간식거리로 키웠을 뿐 주된 농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이 따면 다행이고 적게 따도 그만이었기에 까치가 쪼아 먹어도 그 피해를 일일이 헤아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까치를 위해 과실을 남겨두고 수확하는 마음의 여유도 있지 않았으랴. 하지만 오늘날에는 까치가 떼로 몰려와 주업인 과수 농사를 망친다니 당연히 까치를 원망하며 방조망을 칠 수밖에 없으리라. 그와 같은 사정을 알면서도 까치밥을 남겨두고 수확 했던 예전의 여유로운 모습과 비교하려니 왠지 씁쓸하다. 까치가 아무리 밉더라도 과실 몇 개 정도는 남길 줄 아는 너그러움과 여유가 그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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