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병 호
사랑의 말도 연습이 필요하다
“사랑합니다!”
내가 어느 학교에 부임했을 때 들었던 인사구호이다.
처음 인사구호를 듣고, 나는 기분이 조금 떨떠름했다. 그냥 편하게 “안녕하십니까?”하면 될 것을 굳이 낯간지러운 말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사랑합니다!”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분들은 다 큰 자녀들과 통화하면서도 “사랑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데, 나는 그런 닭살 돋는 말은 하지 못하는 체질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됐지, 그것을 꼭 겉으로 드러내야 좋은 거냐 하는 반감이 생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 부모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이 자랐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서운하게 여긴 적은 없다. 그 때문인지 나도 내 아이들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생각되었다. 만날 때마다 껴안고 입 맞추고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서양인보다는 말이 없는 가운데 진득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사랑합니다!”를 쓰는 학교에 부임하고 보니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인사구호를 다른 걸로 바꾸어버릴까? 그러나 이것도 학교의 전통인데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교장은 그것을 더욱 진흥시킬 책임이 있지 않은가.
결국 나는 생각을 바꿔 “사랑합니다!” 인사구호를 앞장서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 밖에서는 몰라도 일단 학교에 들어오면 누구에게나 “사랑합니다!”로 인사말을 건네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랑합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학생이나 선생님들께 인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몸소 실천하리라고 마음먹은 이상 낯짝에 철판을 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침에든 낮에든 저녁에든 교정 어디서나 “사랑합니다!”를 되뇌었다.
학생들에게서는 재미있는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말을 할 때는 “안녕하세요?”로 화답하더니, “사랑합니다!”로 바꿔 말하자 그네들도 “사랑합니다!”로 응대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대응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선생님들이 문제였다. 어떤 분은 “사랑합니다!”를 잘하는데, 어떤 분은 쉽게 입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사랑합니다!”로 인사를 하면 “사랑합니다!”로 받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우리 학교의 인사구호인 ‘사랑합니다!’는 서로 연애하자는 뜻이 아니잖아요. 사랑의 의미를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남녀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만 사랑인가요?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사제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도 모두 사랑이 아니겠어요?”
교직원회의 때 이렇게 말하며 인사구호를 많이 쓰도록 독려했다.
“사랑합니다!”를 인사말로 쓰면서 선생님들과 친근감이 더 커졌다. 그냥 평범하게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사랑합니다!”로 말하는 것이 더 듣기가 좋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설혹 빈말이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사랑합니다!”가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을 듣기는 좋아하면서 그것을 누구에게 들려주기를 꺼린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입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생각에 머물지만 표현된 말은 현실로 구현되는 속성을 지닌다.”
『무지개원리』를 쓴 차동엽 신부의 말이다. 말을 해야 현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도 자꾸 입 밖으로 꺼내야 실제화된다고 볼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웃음치료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은 행복해서 웃기보다는 웃어서 행복하다고 한다. 일부러라도 웃으면 행복의 에너지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도 같은 이치라고 본다.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더라도 “사랑합니다!”는 언어표현을 통해 실제 사랑이 커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사랑의 말도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애초에 “사랑합니다!”라는 말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평소에 그런 말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익숙해져서 자연스레 말이 나올 때까지 반복 연습을 해야 한다. 외국어 학습도 그렇지 않은가. 평소에 반복학습을 통해 외국어 문장을 외우다시피 해야 실제 외국인을 만났을 때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주위에 사랑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를 기대하며 학교를 떠나는 날까지 “사랑합니다!”인사를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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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1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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