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다가 보니 산소 바로 앞에 대나무 몇 그루가 자리를 잡았다. 저만치 다옥한 대숲에서 세력을 확장한 대나무는 이웃한 묵정밭을 시나브로 점령하고 어느새 그곳까지 뻗어들었다. 대나무군단의 선발대인 냥 싱둥한 그 기세를 보니 머지않아 산소까지 점령할 태세다. 대나무의 쓰임새가 많았던 예전에는 대숲을 관리하며 늘 베어냈으나 오늘날에는 그 쓰임새가 줄어 방치한 결과다. 감파르잡잡한 이파리를 아느작거리며 기세등등하게 서있는 대나무를 어쩔 수 없이 베었다.
윤선도의 오우가에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을까/저러고도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작가가 완도 보길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물, 돌, 소나무, 달과 함께 다섯의 벗으로 여긴 대나무 구절이다. 거기에는 다섯을 벗으로 삼은 연유로 물은 그침이 없고, 바위는 변함이 없으며, 소나무는 눈서리도 모를 만큼 뿌리가 깊고, 대나무는 늘 푸르며, 달은 어둠을 밝히면서도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쓰였다. 그러나 오우가 구절구절을 보면 무엇보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변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기를 바라는 선비정신이 가장 두드러진다. 영원히 변치 않는 바위는 물론이고 계속 자라는 나무에서 ‘변함이 없다’라는 것은 ‘사철 푸르다’는 점이 상징이고 보면 ‘늘 푸른 대나무’는 곧 ‘늘 변함없는 대나무’가 아니겠느뇨. 또한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도 하고 바람소리 맑다지만 그칠 때가 있으나 물은 그칠 것이 없다’라는 물의 구절과 ‘따뜻하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이 지는데 소나무는 어찌하여 눈서리도 모르는가?’라는 소나무 구절에서도 그와 같은 뜻이 드러난다.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로 일컬어지는 대나무는 예로부터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다. 이는 대나무가 곧게 자라는데다 한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고 푸르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란 점에서 나무로 일컬어지지만 줄기에 마디가 있고 속이 비어있어 식물학적으로는 초본식물인 볏과에 속한다. 그러니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다’라고 할 만한 특이한 식물이다. 대나무의 특이성은 그뿐만이 아니다. 나무는 대개 싹이 터서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을 사는 동안 줄기의 직경과 높이가 계속 자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죽순이 나오면서 줄기직경의 크기가 결정되고 높이도 그 해에 다 자라므로 이듬해부터는 그 크기가 변하지 않고 평생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대나무가 빨리 자라는 것은 마디마디의 죽순껍질에 생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디가 자라기 전에 강제로 죽순껍질을 벋기면 짧은 마디 그대로 생장이 멈춘다. 일반적으로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에 죽순이 나와 두 달이 못되어 다 자란다. 왕대는 대개 그 높이가 10미터 이상이니 ‘하루가 다르게 큰다.’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을 두고 “오뉴월 죽순 크듯 한다.”라는 속담을 쓰기도 한다. 곧게 자라고 사철 푸른데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 대나무는 고려말 충신의 ‘단심가’마냥 잘려죽어 쪼개지면서도 곧은 성질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하니 어찌 옛 선비들이 대나무를 좋아하지 않을까나.
대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요람기부터 사귀던 벗을 일컬어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한다. 어릴 때 죽마놀이를 하며 같이 놀던 벗이라는 뜻이다. 중국역사책인 ‘진서(晉書)’에 나오는 말이지만 우리도 삼국시대에 죽마놀이가 정착되었다는 기록이고 보면 오래전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죽마’란 긴 대를 가랑이에 끼우고 말 타는 시늉을 하며 거니는 아이들의 놀이를 말한다.
남부지방의 어느 시골마을을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대나무다. 대숲에는 뿌리가 촘촘히 얽혀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지 않으므로 당초 마을이 생성될 때부터 안전을 위해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으리라. 또한 대나무는 소쿠리나 바구니, 삼태기 등을 만드는데 유용한 재료였으니 일거양득이 아니었으랴. 대나무의 좋은 점은 그 외에도 많다. 한번 심어 놓으면 번식이 잘되고 가지치기가 필요 없으며 대숲에는 다른 식물이 얼씬못하여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크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일 년만 자라면 이후부터는 제 몸을 키우거나 열매를 맺을 필요도 없으니 오로지 잎에서 만든 양분을 뿌리로만 보내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온 힘을 쏟는지도 모른다. 가늘고 긴 몸을 가졌는지라 두려운 것은 세찬 바람일지니 허허벌판에서 홀로 자라지 않고 무리지어 살기 위해서리라. 또 있다. 줄기와 잎이 매끄러운 것은 빗물을 덜 머금고 몸을 가벼이 하여 쓰러지지 않으려는 술책으로 그 이치가 숫제 오묘하기만 하다. ‘우후죽순’이라 했듯이 늦은 봄날, 비온 뒤에 대숲을 가노라면 행여, 낙엽아래 어린죽순 나와 있을세라 발을 사부자기 내딛곤 했었다.
플라스틱바구니가 일반화 된 오늘날에는 대나무의 쓰임새가 많이 줄었다. 다만 갓 나온 연한 죽순을 나물로 쓰면 독특한 맛과 향이 있어 식용죽순의 소비는 오히려 늘었다. 죽순대를 일컫는 맹종죽은 눈이 쌓인 한겨울에 죽순을 캐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효자, 맹종(孟宗)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 외 죽염, 죽부인, 돗자리, 대나무 숯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지만 모모이 치더라도 다직해야 예전 대나무바구니로 쓰이던 양만 못하다.
유럽의 세계적인 명품와인들은 반드시 참나무통에서 포도를 숙성시켜 빚는다고 한다. 예전의 대나무바구니 대신 오늘날에 넘쳐나는 플라스틱바구니와 금속광주리를 보면서 아쉬움이 많다. 환경호르몬의 인체 유해성은 두고라도 대나무바구니의 낭만과 거기에 담긴 나물 맛을 플라스틱바구니가 어찌 따를 수 있으랴. 아쉬움을 달래느라 애오라지 이렁저렁 대나무바구니들을 만들었던 시절의 추억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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