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한 마을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이 아니었다. 코로나 19 관련 뉴스를 보며 거대한 지구가 디딤돌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경이로움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매스컴에서, 가능하면 집안에서 생활해 달라는 당부를 거듭할수록 진정한 바깥이 그리웠다.
아침 일찍 나선 길이 신안 암태도였다. 어디로 갈까 너무 막연해 암태면사무소에 문의했다. 매향비 안내를 받았다. 입안에 신맛이 도는 듯 새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어렴풋이 매향에 관한 토막토막 얻어들은 얇은 지식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면 소재지에서 매향비(암각명문)를 찾아가는 길은 자세한 안내표시가 없었다. 앞면은 바다이기에 갯벌이 훤히 보였고 뒷면은 들판으로 논밭에 푸른 씨앗들이 바다와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었다. 매향비 소재지는 신안 암태도 송곡리의 산모퉁이였다. 616년의 흔적을 간직한 매향비를 통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긴 세월을 품은 매향비는 오랜 풍상을 겪은 만큼 식별이 어렸다. 더 많은 훼손을 막기 위해 철제보호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내석에는 ‘조선 초기인 1405년의 매향비이며 2002년 9월 20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매향(埋香)이란 미래 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향나무를 묻는 민간불교 신앙 의례이다.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랫동안 묻었던 향나무는 약재나 불교 의식용으로 썼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이다. 매향의 장소로서는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만나는 지점이 최적지라고 구전한다.
암태도 매향비는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남북한 전 지역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점이 특이하고, 1982년 7월 목포대학교 도서 문화연구소의 도서 지방 공동학술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매향비는 ‘비석거리’ 서쪽 해발 80여m 되는 산 동쪽 기슭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원래 이 비석은 현 위치보다 약간 높은 산릉(山陵)에 있었는데, 수로공사(水路工事)로 인해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하며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편평한 면에 음각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음각된 자형(字形)의 크기는 6cm∼11cm로 일정하지 않다. 또 비석의 좌측 상단부가 훼손되어 일부 글자 판독이 안 된다.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매향처, 사방기준지, 매향 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석을 세운 경위, 참여자, 시주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암태도 매향비의 특징은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香徒)’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埋香處)’를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다. 여기서 ‘향도’란 승려와 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불교 행사에서 각종 보시를 하거나 매향 작업 등을 하려고 지방민들이 만든 조직을 말한다.
매향비를 통해 침향 의례를 헤아려 보았다. 향나무는 갯벌에 오래 묵힌 것일수록 쇠처럼 단단해지고, 두드리면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고 했다. 침향은 물속에서 천년의 시간을 통해 나무의 무게를 덜어 버린 후, 갯벌 위로 향나무가 떠오르게 되면 다른 쓰임새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 천년의 시간으로 발효된 침향은 태워도 그을음이 나지 않는 가장 질 좋은 향이 되었다. 불가의 사리함이나 불상을 만드는 데 쓸 만큼 소중한 목재였고 최고의 약재로 쓰이기까지 했다.
침향이 좋은 향이나 고급 목재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시대 만족감으로 멈추었을 거라 여겨졌다. 침향 의례가 이루어진 시대적 상황을 보면 고려 말 한 시대가 몰락해 가는 시기였으니, 권력자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민심은 흉흉해졌다. 다시 나라가 세워지는 조선 초기 한바탕의 소용돌이로 거센 피바람이 몰아쳤던 시기였다. 거듭된 고통에 민중은 정신적 의지처가 절실했다. 이에 미륵불께 간절한 염원을 담은 행동적 기복 신앙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어수선할 때면, 탐학한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하곤 했다. 또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해져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 되어, 민초들과 승려가 합심하여 용화 정토를 찾아가려는 일념에서 행한 기복신앙이 싹텄다. 고통을 겪던 민초들이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 곧 침향 의례였다. 이런 내력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였다.
미륵불(彌勒佛)은 삼세(三世) 중 내세(來世) 불로 전해지며, 현세 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 오는 내세의 부처를 일컫는 말이다. 침향 의례에 참여하여 비손하는 이는 백정 농민, 향, 소, 부곡의 천민들과 갖가지 이유로 소외당한 민초들뿐만 아니라 실세에 밀려 소외당한 승려들까지 실로 다양했다.
미륵불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면 제일 먼저 용화신단수 아래서 세 번의 법회를 열어 모든 중생에게 가르침을 주어 깨닫게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세계가 이상적인 국토로 변하여 대지는 유리처럼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으로 뒤덮인다고 한다.
민초들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의 개펄에 향나무를 묻어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침향이 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해서라도 침향을 얻어 용화삼회에 공양을 올리고자 하는 간절한 기원으로 매향은 시작되었다. 이때 미륵불께 바치는 예물로는 향을 올리는 것이 으뜸이라고 여겨졌고, 그중에서도 향 중의 향인 침향을 공양 올리는 것이 최고의 공양이라고 여겼다.
매향은 당대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의례였다. 그런데 요즈음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은 무엇일까. 천사대교를 건너, 돌이 많이 흩어져 있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암태도라고 부르는 이 섬에 찾아와 매향비를 만나고 바다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한 줌 있었다. 암태도는 마치 반야용선(般若龍船) 같다. 팬데믹(pandemic)에 고통받고 있는 우리 모두를 피안(彼岸)의 땅, 행복의 땅으로 인도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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