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행복한 밥상[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교육정책연구소 2025. 3. 10. 09:44

김 미

 

며칠째 비가 이어진다. 조상 대대로 사는 동네에서 살다 보니 덤으로 덕을 보는 일이 많이 생긴다. 요즘은 노인 일자리로 점심을 마을회관에서 준비한다. 홀로 사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사람들은 점심을 하는 날은 마을회관으로 온다. 각자 놀이에 집중하던 닭들이 모이를 찾아 모여드는 모양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정오가 되면 느린 걸음걸이로 마을회관에 모인다. 덕분에 일주일이면 세 번은 한 가족처럼 모여 식사하게 된다. 꼭 오래전에 살아오던 가족 같다. 식구들이 가족을 챙기듯 누군가는 매번 오던 사람이 오지 않으면, 모두가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궁금해한다. 함께 사는 아들 때문에, 병원에 있다니 모두 걱정한다. 나이 든 아들을 노모가 챙겨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마을 회관에서는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아무리 연세가 많은 노인이 계셔도 남자가 있으면 음식을 나눌 때는 먼저 올리게 한다. 혹시나 밥그릇을 나누다 연세가 많다 싶어 노인께 밥그릇을 먼저 놓을 때가 있다. 노인들은 큰 잘 못된 행동을 바로 잡듯 얼른 그 밥그릇은 젊은 남자에게 전해진다. 괜찮다고 젊은 남자가 손사래를 치면 그러는 법이 아니라고 또다시 올린다. 그런 일을 반복해 겪다 보니, 이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자 밥상부터 올린다. 나는 그런 모습이 못마땅하기도 하다. 어려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나 온 노인들이 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어르신들이야 함께 농사일해도 작업복 먼지만 털고 밥상에 앉으면 끝이지만, 노인들이야 시부모 모시랴, 대가족 건사하는데 오죽이나 노고가 많은가 싶기 때문이다. 반찬을 나누다 보면 어중간하게 적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럴 줄 알면서도 살짝 여자들 상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어느새 누군가는 남자들 상으로 옮겨 버린다. 여자들은 안 먹어도 된다며 두말없이 남자 밥상으로 건너 건너 전해진다. 제일 질색하는 사람이 연세가 많으신 노인이다. 여자가 건강해야 가족이 행복한 법이라고 했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마란다. 여자들은 음식 만들 때 간 본다고 먹고, 남았다고 먹고, 맛있다고 먹고 이래저래 먹을 일이 많지만, 남자들은 여자들이 주는 것 이외는 못 먹으니, 남자들이 더 불쌍하단다. 그 소리에 어르신들은 흡족해하며 넉넉한 웃음을 짓는다. 여자들은 뻔한 소리라는 식으로 ‘하하’하며 웃는다. 그렇게 정리되면 숟가락을 들고 편안하게 식사를 한다. 그럴 때 보면 아무리 젊어도 남자는 ‘하늘’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오늘 밥상에 황석어젓이 올라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갓 지은 밥에 빨갛게 양념 된 황석어젓은 흰쌀밥과는 환상의 단짝이다. 황석어젓이 어디서 올라왔냐며 남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임처럼 반긴다. 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왕눈이 아짐은 생글거리며 작년에 한 상자 사담은 것인데 인제 조금 남은 것 다 가져왔다고 보고한다. 짜기는 해도 먹을 만해 가져왔다는 소리에 뭐니 뭐니 해도 젓은 황석어젓이 최고라고 한마디씩 한다. 홀로 사는 노인 회장은 절절 끓는 방에 밥 한 그릇을 비우더니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그 모습을 빙그레 웃고 바라보던 홍어 어르신 노인 회장을 향해“가을에는 고된 가을 농사일로 얼굴빛이 구운 고구마 빛이더니만, 요즘은 잘 익은 호박 빛이니 새장가를 가도 되겠다”며 농을 건넨다.

둘러앉아 먹는 마을 사람들의 밥그릇이 다 비어갈 즈음이었다. 서울 언니는 밥 먹다가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주방으로 아픈 허리를 굽혀 간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풍년 압력밥솥을 밥상 곁으로 들고 온다. 누군가는 압력솥 받침대를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재빠르게 곁에 있는 전화번호부 책을 대신 밀어놓는다. 순간에 누룽지 솥은 사람들 중앙쯤 놓인다. “누룽지요” 하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누룽지 달라는 소리가 칠산 바다 조기 울음소리처럼 웅웅거린다. 누룽지하나만은 뽀드득뽀드득 잘 문지르는 서울 언니 손이 솥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구수한 누룽지 냄새에 사람들 눈길이 솥으로 쏠린다. 성급한 나는 밥솥 곁으로 엉덩이부터 밀고 간다. 누룽지가 많으니 앞에 있는 밥그릇 달라고 소리치더니 차례차례 빈 밥그릇에 한 국자씩 떠 올린다. 밥그릇보다 국자가 더 크다. 끈적한 숭늉이 그릇에서 차고도 넘친다. 그새 밥솥 긋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한 국자씩 떠낼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분명 남자들부터 다 돌릴 것이다. 이후 여자 밥상에서 나이 순서로 나눌 것이 뻔한 순서다. 막둥이인 내 몫까지 올 턱이 없다. 여자 상에 절반도 나누기 전에 쇳소리가 유독 내 귀에 거슬린다. 냄새나 풍기질 말든지, 누룽지에 먹겠다고 황석어젓을 따로 남겨 놓았었다. 빈 입에 황석어젓만 밀어 넣었다. 숟가락만 빨고 있는 내 모습이 처량 맞았나 보다. 바로 내 맞은편 최고령 노인은 여윈 손에 누룽지 그릇을 부들부들 떨며 내게 준다. 배가 부르니 누룽지 안 먹어도 되겠다고 굳이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어린 시절 유독 나를 챙겨 주었던 할머니 모습 같아 울컥해진다. 집안 행사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먹었던 밥상처럼 화기애애하다. 요즘 우리 마을 사람들은 집에서는 혼자이거나 둘이지만, 마을 회관 밥상에 모여 앉으면 대가족이다. 가족이 많다는 건 내편이 많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더욱 행복하다. 이 비가 그치면 봄나물이 더 오른 밥상을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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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밥상

김 미 며칠째 비가 이어진다. 조상 대대로 사는 동네에서 살다 보니 덤으로 덕을 보는 일이 많이 생긴다. 요즘은 노인 일자리로 점심을 마을회관에서 준비한다. 홀로 사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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