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하고 정연(整然)한 바늘잎마다 한겨울에도 끄떡없는 기상(氣像)이 서렸다. 늘씬하게 뻗어 오른 허리 줄기와 짙푸른 잎들을 붙잡은 가지가 수줍은 새색시 얼굴빛처럼 불그레하다. 더불어 뿌리에 의존하고 버티며 위로 생명수(生命水)를 보내느라 애쓰는 밑둥치의 검붉고도 앙상한 외피에는 평생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며 세월에 그을린 노부모의 광대등걸만한 처연(悽然)함이 배어 있다.
선친이 잠든 소나무 숲, 필자가 코흘리개였던 50여 년 전에 당신께서 헐벗은 땅을 사들이고 정성을 들여 지금은 낙락장송이 울창하게 된 곳이다. 그곳에 이드거니 서서 상큼한 솔향기에 취하며 그 땅을 사들인 일화를 되새겼다. 당시에는 아궁이에 나무를 태워 밥을 짓고 쇠죽이 끓던 가마솥 아래에서 장작불이 이글이글했으니 아침저녁이면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골짜기가 자욱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하루 두 세 번씩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니 땔감을 마련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다. 특히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이면 산에 올라 땔감을 구해 오는 일이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하지만 남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기가 쉽지 않아 산을 확보하기로 작정하고 있던 차에 마침 적당한 자리가 나와 사들였다는 것이다. 잔솔이 섞인 잡관목(雜灌木)뿐인데다 여기저기 맨땅도 드러난 2.9ha의 벌거숭이산, 그런데 저만치 모퉁이에 관(棺)을 짤 수 있을만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딱 한 그루 서있더란다. 허나 웬걸, 그 소나무를 베어 마련한 금액이 그 땅을 사들이는데 들어간 금액보다 더 많았다니 지금으로선 고개가 갸웃해질 뿐이다.
어린 날에 가끔씩 선친을 따라 그 산에 오르곤 했던 나는 당신께서 소나무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고 소나무를 직접 심었던 것은 아니며 그저 인근에서 바람을 타고 내려앉은 씨앗이 싹을 틔운 유목(幼木)들이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솎아주거나 주위의 잡목(雜木) 제거는 물론 곧게 자라도록 가지자르기에 이르기까지 그 정성이 대단했기에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어렴풋하게 기억되는 그 실랑이란 게,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클 것을 뭐 하러 저렇게 헛일을 하는지 모르겠네.”라는 뜻의 어머니 허텅지거리에, 당신께서 “가지를 잘라 주면 곧게 커서 나중에 쓸모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땔나무 밖에는 쓸데가 없어요.”라는 요지로 맞받아치는 수준이었다.
선친께서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도 소나무를 최고로 여기셨기에 다른 나무들은 땔감으로나 쓰는 잡목 취급을 받으며 배어지기 일쑤였다. 또한 1970년대 당시 정부에서 산림녹화(山林綠化) 차원으로 외래종인 ‘리기다소나무’를 권장했을 때도 절대 심지 않았고 오로지 우리 고유의 육송(陸松)만을 가꾸셨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어느새 그 소나무들이 아름드리로 자랐고 산소에 갈 때마다 당신의 채취가 흥건하여 고요할지언정 결코 적막하지 않은 그 숲을 거닐어 본다. 그럴 때면 가슴 아래의 잔챙이 잡목들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거나 때론 허리를 후려치며 지싯대고, 낙락장송들은 자기들이 먹다 흘린 햇빛 부스러기로 간신히 살아가는 그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바람 따라 휘파람을 불어댄다.
오늘날 한반도 산록(山麓)에는 소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이 참나무다. 그런데 참나무는 땔감으로 이용할 때의 화력(火力)이 소나무보다 더 좋다는 점 말고는 쓰임새 측면에서 소나무를 따르지 못한다. 물론 참나무도 쓰임새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인 건축재로의 쓰임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 건축재뿐만이 아니다. 예전 보릿고개를 겪을 때는 소나무의 속껍질이 식량이었다고 하며 송진도 쓰임새가 많은데다 솔잎 또한 머리를 검게 하고 건강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나는 산에 오를 때마다 육송의 바늘잎 수십 개를 따서 깨물고 즙액(汁液)을 먹는다. 그러면 우선은 혀가 푸르뎅뎅한 솔잎찌꺼기를 뒤발하고 떨떠름한 맛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대가는 제법 쏠쏠하다. 건강과 검은 머리털 생성이야 긴가민가하니 두고라도, 코가 그 향기에 취하여 오달진 미소를 짓는가 하면, 목구멍에 진을 치고 안달하던 갈증도 득달같이 줄행랑치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일본의 산록을 장악한 삼나무는 봄철마다 인체에 해로운 꽃가루를 날려 애를 먹인다는데, 소나무의 샛노란 꽃가루로는 떡을 해 먹거나 물에 괴서 황금빛 붓글씨를 쓸 수도 있으니….
이 땅에 소나무가 가장 많은 까닭은 여태껏 우리 조상들이 쓸 데가 많은 소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가꿨기 때문이다. 그 증거를 반송에서 찾을 수 있다. 소나무의 한 종인 반송은 전국적으로 여섯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외줄기가 올라와 자라는 소나무와는 달리 밑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 모양새가 아름답다. 그러니 예로부터 선비들이 좋아했음에도 오늘날 반송의 집단자생지가 거의 없고 띄엄띄엄 어쩌다 한 그루씩 자라고 있는 이유는 건축자재로 쓸 수 없어 베어내거나 방치하며 가꾸지 않았기 때문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소나무도 만약 우리가 무관심 하며 가꾸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반송처럼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리라.
그런데 앞으로가 문제다. 여태껏 금수강산에서 끄떡없이 자라던 소나무였지만 만약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바뀐다면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는 전망 때문이다. 더구나 기후전문가들에 의하면 아열대기후 한반도 상륙이 머지않았단다. 실제로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니 찌무룩함을 넘어 가슴조차 먹먹해진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말고도 모든 인류가 지구촌의 온난화를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으랴.
기사더보기:
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127671
소나무 숲
박 철 한 꼿꼿하고 정연(整然)한 바늘잎마다 한겨울에도 끄떡없는 기상(氣像)이 서렸다. 늘씬하게 뻗어 오른 허리 줄기와 짙푸른 잎들을 붙잡은 가지가 수줍은 새색시 얼굴빛처럼 불그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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