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저녁노을[미래교육신문]

교육정책연구소 2023. 6. 14. 09:32

박 철 한

여름하늘을 종일 여행하던 해가 서산마루에 몸을 숨긴다. 포동포동한 해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여태껏 뽐내고도 아쉬웠는지 자취를 감추면서 서쪽하늘에 불그레한 노을을 남겼다. 저녁노을이라니, 이게 얼마만인가. 30여 년 전 완도의 어느 섬에서 일할 때 해변에서 본 후로는 못 보았으니 기억조차 아스라하다. 어쩌면 저토록 곱게 물들었을꼬. 저 멋거리진 하늘을 그대로 오려 넓은 방 천정에 붙여두고 늘 보고 싶다. 저녁나절에 도심을 벗어나 서쪽으로 달리면서 눈에 들어온 경관(景觀)이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한참을 바라보며 마음에 담았다.

노을은 해돋이 이전의 동쪽하늘이나 해넘이 이후의 서쪽하늘이 붉게 보이는 현상으로 그곳의 날씨가 개어 있을 때 생긴다. 그 원인은 태양광선 중, 파장이 짧은 파랑 광선은 대기 중에서 산란되고 파장이 긴 빨강 광선만 통과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위도지방의 기압계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쪽하늘이 고기압일 때 생기는 아침노을은 뒤따르는 서쪽의 저기압으로 이후에 비가 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저녁노을은 그곳의 고기압이 동쪽으로 이동하며 다가오기 때문에 이후에 날씨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추수철인 가을이면 어른들이 날씨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혹, 아침노을이 지면 그날은 비가 올 것으로 알고 걱정을 하였으나 저녁노을이 지는 날이면 다음날은 맑을 것으로 믿으며 안심을 하였다. 노을을 보고 날씨를 예측한 것인데 그중에서 저녁노을에 대한 추억이 많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여름날에는 찐 감자를, 가을에는 옥수수나 고구마를 먹으며 늘 보던 것이 저녁노을이었다. 또한 뒷동산에 올라 따개비를 잡아 구워먹으며 해넘이가 지나도록 놀다가 풀밭에 앉아서도 보았다. 특히 가을에 저녁노을을 보는 날이면 집에 오자마자 부엌의 어머니께 “엄마!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아요.”하고 외치곤 했다. 어머니께서 “왜?”하고 묻기라도 하면 그때는 불그레한 서쪽하늘을 가리키며 “저걸 보세요.”하면 어김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래전 소안도 비자리 해변에서 보았던 저녁노을도 잊을 수 없다. 가운데가 잘록하게 남북으로 이어진 남해의 작은 섬, 잘록한 곳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동, 서, 양쪽 해변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동쪽 해변은 모래와 돌들이 널려있고 서쪽으로 부두가 자리하며 저 멀리 고산 윤선도선생의 유배지였던 보길도가 바라다 보인다. 특히 석양이 내려앉고 서쪽 지평선 위에 노을이 지는 날이면 건성드뭇하게 떠있는 고깃배들과 어울려 그 전경(全景)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동쪽의 거센 파도는 끊임없이 해변을 핥아대고 그때마다 몸뚱이가 씻기며 곱다래진 돌멩이들도 기억에 남는다. 거기에 서면 세상의 모든 소음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묻히고 오직 파도에 밀려 나뒹구는 조약돌들의 아우성만이 희미할 뿐이다. 밤에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도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야만 하는 그곳, 여름날이면 이슥한 밤이라도 철썩이는 소리의 서정에 이끌려 멀지 않은 해변으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녁노을이 너무도 아름다워 석양이 질 무렵이면 자주 그 해변을 배회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큰 배가 닿지 않아 바다위에서 종선으로 갈아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정겨운 모습들을 오롯이 품은 그곳이 그리워진다.

요즘 도심에서는 저녁노을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어쩌다 초저녁에 창문을 열고 서쪽하늘을 보면 빌딩 숲과 네모진 틀 안에서 새나오는 하얀 불빛만이 어지러울 뿐이다. 맑은 날에 높은 곳에 올라 서쪽 지평선을 바라봐도 보유스름하니 우중충한 하늘과 그 아래로 온통 전등불빛만이 가득하여 노을이 진들 거기에 무슨 낭만이 있으랴. 매일 출근하는 일터가 도심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오랫동안 저녁노을을 못 보았을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수십 번은 눈에 띠었을 것이나 마음에 담지 않았으니 기억이 없는 것이리라. 하기야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 어찌 저녁노을이 눈에 들어오랴.

고향마을을 가도 어린 시절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함께 뛰놀던 숲정이의 잔디밭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렇더라도 올 가을에는 고향마을 뒷동산에 올라 저녁노을을 꼭 보고 말리라. 그리고는 입에 손나팔을 하고 마을을 향해 “내일은 날씨가 참 좋겠어요!”라고 외치리라.

기사더보기:

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60106

 

http://www.miraenews.co.kr/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2060000&gisa_idx=60106

 

www.miraenews.co.kr

#박철한 #수필가 #저녁노을 #미래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