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가을이다. 공기는 서늘하면서 청량하고,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밤이면 서정적인 풀벌레 소리가 귓등을 타고 마음을 거쳐 몸 전체로 퍼진다. 가을이면 사람들은 우수에 잠기고 마음속 깊은 곳의 말랑말랑한 어떤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게도 가을은 가슴으로 다가오는 계절이다. 오래전 가을에 경험했던 일들이 이 시기만 되면 그 느낌까지 되살아나 그때의 감정을 반추하게 한다. 나에게 잊지 못할 가을의 기억이 로맨틱한 사랑의 추억이라면 더 좋겠지만 사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얽힌 이야기이다.
내가 대학 입시를 치르던 때는 지금과 달리 입학전형이 매우 단순했던 시대였다. 내신성적과 수능점수로 대학을 가던 ‘라떼는...’ 시절이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지만 여전히 나는 첫 수능을 치르던 그날의 풍경과 떨리던 마음과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5년 11월 22일! 수요일이었다. 12년 학습의 결과를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받는다는 부담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수능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새벽을 맞았다.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데 차가운 가을의 냄새가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바스락거리고 서늘한 그때의 냄새가 내 세포까지 각인되어 지금도 당시의 느낌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수능 고사장에 도착하니 학교 후배들이 징, 장구, 꽹과리를 치며 요란스럽게 응원을 해줬다. 한참을 걸어 고사실 내 자리에 도착해 앉으니 긴장과 부담감이 엄습해왔다. 늦가을이었지만 입시한파는 그날도 찾아왔고,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있었다. 머릿속으로 시험 전략을 짠 후 정성스럽게 챙겨 간 성경책에 두 손 얹고 기도를 했다.
시간이 되자 감독관이 들어와 시험 안내를 하고 1교시 언어영역이 시작되었다. 나는 언어영역과 사회탐구에 강했지만 1교시부터 시험은 어려웠다. 2교시 수리영역은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풀었다. 사건은 3교시 과학탐구와 사회탐구에서 발생했다. 과학탐구를 풀다가 시간이 부족해 가장 자신 있는 사회탐구 문제를 다 풀지도 못한 채 대여섯 문제를 내리찍고 답안지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소위 멘붕이 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수능 시험장에서 19년 인생에 첫 절망감을 느낀 것이다. 멘탈이 흔들리고 감정이 북받치자 4교시 외국어영역은 엉망이 되었다. 모든 시험을 마치고 오후 5시 무렵 고사장 밖으로 나오는데 그새 어스름이 깔려 있었고,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늦가을 저녁 어스름은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감춰주었고, 차가운 공기는 절망적이었던 내 마음을 보듬어주었다. 그렇게 나의 첫 수능은 눈물과 회한으로 남아 가을의 기억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11월에 수능이 치러진다. 1995년 이후 매년 수능이 치러질 즈음 내 안에 깊이 자리잡은 가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떨림, 걱정, 긴장, 안쓰러움, 부담 등 수없이 많은 감정이 수능 속에 녹아 있다. 자녀를 시험장에 들여보낸 후 굳게 닫힌 철문을 부여잡고 간절한 마음과 눈빛으로 하염없이 고사장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모습과 모든 시험을 마치고 나와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는 수험생들의 모습에서 오래전 19살 순수했던 나를 만나게 된다. 수험생에게는 그저 따스한 가슴으로 안아주고 등 두드려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될 것이다. 내 가을의 기억을 소환해 올해 수험생과 가족들 모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담담히 시험 잘 보시길 한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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