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광(광주광역시교육청 장학사, 교육학 박사)
유년시절의 기행
얼마 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 창밖 너머로 웽~하는 익숙한 소독기 굉음이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창가로 가 소독기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부터 확인했다. 시야가 허용하는 범위를 훑고 또 훑으며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소리의 실체를 발견했다. 마스크를 쓴 방역요원이 소독기를 어깨에 걸쳐 메고 하수구와 가로수 밑 풀밭 구석구석에 하얀 연기의 소독제를 뿜어대고 있었다. 웽~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잠시 후 퍼지는 하연 연기 속 기름 냄새는 불쾌감 보다 유년시절의 향수를 이끌어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여름 저녁 무렵이면 소독기를 단 용달차가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골목 구석구석을 돌았다. 골목에 모여 놀던 아이들은 소독차의 굉음에 공포감을 느꼈지만, 소독차 꽁무니에서 내뿜는 하얀 연기의 환상적 유희는 설렘과 흥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소독차를 방구차로 부르며 꼬마들의 잰걸음으로 따라가기 힘들 때까지 소독차를 쫒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 기억에 방구차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여름철 긴 해 덕분에 아이들은 늦은 시간까지 골목에 모여 석가 맞추기(비석치기), 나이 먹기, 구슬치기, 딱지, 오징어, 동그랑땡, 도넛츠와 같은 전래놀이를 즐겼다. 지금은 놀이 방법도 가물거리지만 그 때는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놀이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멀리서 소독차의 굉음이 들리면 아이들의 놀이는 일시중지 되었다. 방구차의 굉음이 점차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를 방구차를 긴장과 흥분 속에 기다렸다. 이윽고 골목 어귀를 돌아 방구차가 등장하면 아이들은 환호성과 함께 방구차 꽁무니를 따라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기억은 유년시절 놀이의 추억으로 각인된 한 세대의 경험일 것이다.
40대의 유년기에는 골목의 문화가 살아 있었다. 이웃 또래는 형제자매처럼 여기며 서로 아웅다웅하지만 옆 동네 아이들과 싸움이 붙을 때면 앞장서 편을 들던 공동체문화가 살아 있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쏟아질 듯 가득했고, 아침 공기는 언제나 신선했다. 뒷산 약수터에는 약수를 담아가기 위해 줄 선 말통 행렬이 매일 아침 장사진을 쳤고, 동네 여기저기 핀 사루비아 꽃을 따 꿀을 빠는 아이들 천지였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낸 지금의 40대는 자신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자녀를 키우고 있다. 지금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어울릴 마음도 없다. 대신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고 동네마다 존재하는 PC방이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가야하고 학원이 끝나면 또 다른 학원으로 가야한다. 그렇게 밤이 될 즈음 집에 와서 학원 숙제를 하며 새벽녘에 잠을 잔다.
지금 아이들이 40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유년기 시절 추억은 무엇이 될까?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에서 항상 마스크를 쓰고, 복잡한 도시에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와 뺑뺑이 돌 듯 한 학원이 추억이 되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한가. 어쩌면 기성세대는 후세대에게 결핍된 문화를 물려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진보한다고 말하지만 진정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이는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아이들이 유년시절을 추억할 때 좀 더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들로 채워 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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