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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교육청 동북아평화탐방단 7개월 여정 종료[미래뉴스&미래교육신문제공]

교육정책연구소 2019. 10. 17. 14:13



광주시교육청 동북아평화탐방단 7개월 여정 종료

나라는 다르나 언어는 같다.

광주 학생들, 중국 조선족학교 학생들과 항일현장 돌며...조각난 민족․분단된 나라에 던진 ‘어떤 미래’

 

'현장에서 배우는 평화와 역사'를 주제로 2019년 3월 시작한 광주교육청 ‘2019 동북아평화탐방단’ 7개월 여정이 지난달 28일 탐방단 해단식과 10월 결과보고서 제출을 끝으로 종료된다.

평화탐방단은 3월 기획단 구성과 4월 사전답사 후 5~6월 참가자 모집을 완료했으며, 7월27일부터 8월31일까지 국내 평화캠프를 비롯한 1‧2‧3차 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9월 6일부터 11일까지 중국 동북3성을 탐방하며 국제 평화와 통일 관련 활동을 수행했다. 길었던 여정을 줄여 4부작으로 연재한다.

 

▲한국말을 못하는 조선족 학생들도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현지 여행사 대표의 설명. 중국말을 못해 애를 먹던 조선족 학생들은 이제 과거 얘기고 중국말을 모국어로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운다고 했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요녕성 심양)에서 만난 조선족학교 학생 중 10~20%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4할 정도는 한국어로 간단한 회화가 가능했으며 3~4할은 능숙하게 사용했다. 한국 학생들과 만난 조선족 학생들 중 언어가 통하는 아이들은 게임을 같이하며 1시간 만에 서로 친해졌다.

그날 저녁부터 서로 중국어 등을 배우고 가르치기도 했다. 언어는 민족이 분리된 굴곡진 근현대사(1909년 간도협약 등)와 국경을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아이들은 운동을 함께하며 잠깐 화기애애하다가도 다시 서먹해 했다. 1년에 한 번 있는 교류 행사였지만 이런 경우엔 언어의 벽이 국경보다 높았다.

광주 고등학생 80명이 추석을 앞둔 9월 6일부터 11일까지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 항일유적지와 조선족학교 등을 방문해 남북통일과 동북아 평화 실현을 위한 동북아평화탐방단 활동을 진행했다.

광주시교육청(교육감 장휘국)이 주최했으며, 시교육청과 (사)광주광역시남북교류협의회, (사)우리민족이 주관했다.

평화탐방단 5박6일간 활동은 쉴 틈 없이 진행됐다. 첫 3일간은 조선족학교 학생들과 항일 유적 공동 답사 등 교류 시간을 가졌다. 이후 3일은 백두산, 봉오동 전적지, 북중접경 두만강광장, 명동학교, 윤동주 생가, 3‧13 반일의사릉, 일송정 등을 방문했다.

학생들은 출국 전 7월27일, 8월 10~11일, 8월31일 총 4일간 국내 연수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 한민족 이주사, 조선족의 이해, 성인지력에 대해 배우고 안전 교육도 받았다.

6일 오전 심양공항과 하얼빈 공항에 각각 도착한 학생들은 조선적 친구들에게 전할 중국어 인사말을 되뇌며 입국 절차를 밟았다. 학생들은 사전에 1대1로 짝이 된 친구가 정해져 있었고 주로 중국에서 사용하는 메신저 ‘위쳇’을 통해 간단한 프로필을 알고 있었다. “프로필이 무섭다”는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하얼빈팀 학생들은 오후 3시30분 드디어 하얼빈시 조선족 제1중학교에 도착했다. 버스 2번과 비행기 1번을 타고 온 한국 학생들을 조선족학교 학생들이 나와서 ‘조선어’로 맞이했다.

한국식으로 보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조선족 제1중은 입구 표어를 ‘한글’로 크게 적어놓고 있었다. ‘사랑 꿈 대화가 있는 우리학교,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곳.’ 언어가 그 민족이 그곳에 산다고 말하고 있었다.

바로 학교 소개와 교류활동을 시작했다. 해방되고 2년 후인 1947년 ‘할빈시조선인민중학부’로 개교한 제1중은 1962년 현재 이름을 갖게 되고 1978년 ‘할빈시 중점중학교’, 2004년 흑룡강성 시범성 보통중고등학교‘로 선정되는 등 지역 ’입시명문‘ 역할을 하고 있다. 학생 수는 총 500명, 이중 절반가량이 조선족 학생이다.(이번 교류에는 조선족 학생 40명이 참여했다.) 조선어, 한어(중국어), 영어, 일본어 네 가지 언어를 함께 쓰고(병진) 있다고도 했다.

학교 일부 외관은 개화기 학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을 하고 있었으며, 규모가 크지만 단정했고 넓은 인조 잔디 축구장과 야외 농구장, 각종 현대화된 교육 설비 등을 갖추고 있었다.

현관에는 ‘하면 된다’는 한국어 표어 액자가 한자 표어와 함께 걸려 있어 이곳이 조선족학교임을 보여줬다. 각 교실 학년‧반 표시는 한글과 중국어를 병용했고 학교 곳곳에 한글 표어와 한국 문화를 중국어로 소개한 안내판이 게시돼 있었다. 학생들 교육 소감을 붙여놓은 현관 게시판에는 한글과 중국어가 1대10 정도 비율로 적혀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소개가 끝나고 단체 줄넘기, 풍선 옮기기 등 간단한 야외 활동으로 교류를 시작했다. ‘이(1) 얼(2), 싼(3)’이 아닌 ‘하나, 둘, 셋’을 함께 외친 단체 줄넘기에 서먹함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10명 정도가 손을 잡고 풍선을 옮길 때는 풍선의 예측 못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즐거워했다.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좋아하는 남학생이 누구냐”는 등 비밀을 공유하며 친분을 쌓는 모습도 보였다. 누군가 “축구부에 있다”고 말하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는 1중 축구부 학생들에게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남학생들은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서로 모르는 기능을 알려주기도 했다. 여학생들 보다는 살짝 어색해 했다.

저녁식사를 함께하고는 각자가 준비해 온 춤, 노래, 악기 연주를 무대에 올렸다. 누가 정하지도 않았는데 주제는 ‘K팝’이었고, 학생 한명 한명은 ‘아이돌’이 됐다. 마치 옆 동네 고등학교 축제에 놀러간 날처럼, 비행기를 타고 멀리 왔다는 느낌마저 사라졌다. 조선족 학생과 한국 학생들은 그날 밤 입국 전부터 짝으로 정해진 동성 친구들과 배정된 숙소에 묵었다. 중국 마트에서 산 음료수와 과자를 먹으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2일차. 일본군731부대 죄증전시관을 다녀오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배들은 중국과 손을 잡고 일본과 싸운 경우가 많았다. 일부 상황을 제외하면 일본은 공통된 적이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현재 하얼빈 역에 있고 중국이 그를 기리는 모습을 보면 그런 역사를 알 수 있다. 731부대 죄증전시관에선 일본군 만행에 대한 살아있는 분노를 읽을 수 있다.

평화탐방단 2일차. 많이 친해진 학생들은 이날 오전 일본군731부대죄증전시관을 찾았다. 더 말할 것도 없는 야만적 기록에 학생들은 함께 분노했다. 전시관 해설이 대부분 중국어라서 조선족 학생들이 해설을 해줬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대부분 처참함에 말을 잊었다.

오후에는 하얼빈 도시계획 전시관과 태양도 공원을 방문했다. 도시계획 전시관에선 하얼빈 역사에 대해 배웠으며 태양도 공원에서는 꼬리잡기, 제기차기 등을 하며 공동체 놀이를 진행했다. 민족 전통놀이인 제기차기를 할 때는 하얼빈 시민들이 다수 모여 구경하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학생들은 야경으로 유명한 하얼빈 중앙대가를 함께 산책했다. 두 번째 밤은 빨리도 지나갔다.

 

▲3일차 안중근 기념관에서 의거를 재현하다

오전 8시40분 하일빈 역 정문 왼편에 마련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함께 찾았다. 입장료는 무료였으나 여권을 확인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등 절차를 거쳤다. 기념관에는 동상, 그림, 친필 유묵, 당시 사진, 신문 보도, 가족에게 보낸 편지, 유서 내용 등이 전시돼 있었다.

또한 실제 의거 현장에 지점과 방향이 표시되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은 실제 발사 지점에서 의거를 재현하면서 의사의 정신인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가슴으로 느꼈다. 학생들은 방명록에 ‘잊지 않겠다’고 적으며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교류가 끝나고...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끝으로 2박3일 교류가 끝났다. 도착지가 다른 버스를 앞에 두고 한국 학생들과 중국 조선족 학생들은 끌어안고 울었다. 민족이 버텨온 기구한 역사를 함께 지켜봤기 때문일까? 헤어지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나라가 망하고 109년. 민족은 남과 북, 중국으로 나뉘고 러시아 등 여러 국가로 흩어졌다. 이날 다시 헤어진 우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침대열차로 11시간에 버스로 2시간. 또는 버스로만 12시간.

광주 학생 80명 등으로 구성된 ‘동북아 평화탐방단’이 심양과 하얼빈에서 백두산 서파까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9월8일 학생들은 각 도시에서 진행한 교류 활동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기차와 버스에 각각 몸을 실었다. 하얼빈팀 학생들은 숙소에서 전날 늦게까지 조선족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시내 중앙대가를 걸으며 러시아, 독일 등 근현대사 열강들이 하얼빈에 남긴 다양한 흔적들을 함께 확인하기도 했다.

1063만 명에 면적 5만3천km². 거대 도시 하얼빈은 그 규모만으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게 아니었다. 19세기 유럽을 연상시키는 도시 외관과 열강의 오래된 대사관들. 일본과 러시아, 중국 간 세력 다툼이 남긴 흔적. 그 사이에 뚜렷이 남아있는 한민족의 발자취, 독립운동가 선배들이 피로 남긴 기록은 민족은 같지만 나라가 다른 양국 학생들에게 함께 공유하고 있는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선보였다.

교류 시간이 끝나고 하얼빈을 떠난 버스는 끝도 없이 달렸다. 정주영 현대 전 명예회장이 새로 만든 서해 간척지를 보고 “만주 벌판 같지 않냐(그 정도로 넓다는 뜻)”고 했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 전세 버스 좌석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옥수수밭과 침엽수림을 본 학생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어떤 향수에 잠겼다.

9월7일 한반도를 관통한 13호 태풍 링링은 8일 북중접경을 지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서쪽 170km 부근까지 북상해 어느새 버스 창문에 비를 뿌렸다. 백두산 인근에도 비 예보가 나왔다.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밤 9시가 조금 안 돼 송강하 호텔에 도착했다. 송강하는 백두산 등반객들에게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 긴 여정에 지친 탐방단에게 이국의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백두산 입구에서 만난 두 탐방단, 태풍은 소멸했으나 비 예보

심양팀 탐방단이 11시간 심야열차와 버스를 타고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1박2일 안전교육을 함께 받은 후 첫 만남. 학생들은 반가움을 표현하며 뜨겁게 재회했다.

백두산에서 두 팀이 하나 되는 일정은 출발 전부터 계획된 상징적인 여정이었다. 민족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백두산에서 하나 되어’ 천지에 오르는 여정으로 녹여냈다.

백두산 입구에서 갈아탄 버스는 또다시 1시간 동안 산길을 달렸다. 는개가 날리고 안개가 수시로 오고 갔다. 태풍은 전날 소멸했다고 했으나 인솔 교사들은 여전했던 비 예보를 떠올리며 탐방단 학생들이 ‘천지’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속으로 걱정했다.

버스는 서파 천지 주차장에 도착했고 학생들은 천지로 향하는 서파 1442계단을 올랐다. 중간 정도 오르자 토식토가 쌓인 백두산 정상 부근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부식토가 쌓여 사계절 하얗게 보여 흰산이라 불렸다는 백두산은 말 그대로 ‘흰 머리 산’이었다. 올라갈수록 숨이 차오르고 안개가 진해졌다. 안개는 천지에 도착하기 직전이 가장 진했다. 태풍 뒤끝이라 그 정도도 속으로는 감사한 지경이었다.

1시간가량을 올라 드디어 천지에 도착했다. 여전히 자욱한 안개에 실망은 잠시. 기다렸다는 듯 안개는 걷히고 천지가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전율할 그 모습. 학생들은 개별로 또는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거나 천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모두들 마음속으로 통일을 기원했다.

탐방단은 백두산 등정을 마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행정중심지인 연길로 이동했다.

 

▲총살당해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둔 아내 사연

두만강을 건너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총살당해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둔 아내의 사연이 담겨있다고 했다.

9월10일 동북아평화탐방단 학생들은 일제강점기 1938년 발표된 ‘눈물젖은 두만강’을 들으며 두만강 북중접경을 바라봤다.

물은 푸르지 않았다. 멀리 북한 주민이나 경비병을 보았다며 “저기! 저기!”를 말하고는 손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두만강 광장에 전망하는 장소를 제외하고는 북중접경에 철조망 공사가 한창이었다. 을사늑약으로 시작된 민족사 비극은 아직 두만강처럼 탁하게 흐르고 있었다.

동북아평화탐방단 여정은 백두산 천지를 지나 5일차 연변‧도문‧용정 등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로 이어졌다.

이날 오전 탐방단을 실은 버스는 먼저 봉오동 전적지로 향했다. 지금은 ‘봉오저수지’로 변해있는 전적지. 영화 ‘봉오통 전투’ 개봉 시기와 맞물려 당국 통제가 강화된 상태였다. 탐방단은 저수지 경계에서 기념촬영 후 멀리 보이는 전적지를 살피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다시 이동하는 버스에선 민족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이 울려 퍼졌다. 탐방단 학생들은 가요에 담긴 사연과 당시 선배들이 펼쳤던 독립운동에 대해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거나 동행한 지도교사에게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내린 도문 두문강 북중접경에선 북한이 지척이었다.

강변 철조망에는 ‘비법월경을 금지한다’는 붉은색 팻말이 선명했다. 해방 후에도 두만강을 건너 북한과 중국을 크게 어렵지 않게 왕래하던 시절도 상당 기간 있었다고는 하나 현재 통제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 설명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러 간다는 남편을 잡지 못해 보냈지만 눈물로 슬퍼하는 아내의 마음이 아직도 탁한 강물에 흐르는 듯했다. 이어 방문한 두만강광장에는 과거에 없었던 철조망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명동학교옛터기념관. 명동학교는 1908년 명동촌에 세워져 일본 탄압 등으로 1925년 폐교되기까지 17년간 12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민족교육자, 애국청년을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등도 명동학교를 다녔다. 당시를 재현한 교실에는 실제 명동학교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서가 고증되어 함께 꽂혀있다.

나라가 없어진 학생들이 배운 교과목은 ‘법학, 지리, 외교번역, 산수, 위생, 군사체육, 리씨조선사’ 등이었다. 그 외 ‘누에 키우는 기술, 기와 굽는 기술, 베를 짜는 기술’ 등 직업교육 과목이 눈에 띄었고 ‘성경, 맹자, 논어, 대학, 황제내경’ 고전과 함께 ‘음악, 광물학, 사범교육, 농림학’ 등도 배웠다.

구식 난로가 있는 좁은 교실 낡은 책상에 앉은 탐방단 학생들은 당시 학생들 사진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명동학교기념관 앞에 모여 가슴에 손을 얹고 기념촬영을 했다. 여학생 한명이 돌아서며 말했다. “내가 이 시절에 태어났으면 독립운동을 했을까?”

윤동주 생가는 명동학교에서 5분 거리. 윤동주 ‘서시’가 영어로 적힌 티셔츠를 입고 온 탐방단 한 학생은 윤동주 생가에서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탐방단은 이후 용정시 중점 문화재보호단위인 3‧13 반일의사릉을 참배하고 일송정으로 향했다.

일송정에선 길게 흐르는 해란강이 보였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과거보다 수량이 많이 줄었다고.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그 해란강. 전설을 실제로 만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만주에서, 좁게 말하면 용정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배들은 힘들 때면 ‘일송정’을 바라봤다고 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한 가운데 있는 산. 그 산 정상에 정자 모양으로 커다랗고도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신기하게 멀리서도 잘 보이는 그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언젠가는 독립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들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독립운동 논의도 일송정 부근에 모여 많이 했다는 설명까지 이어졌다. 탐방단 학생들은 일송정에서 독립운동 영화를 조별로 재현하는 스스로 정한 ‘임무’를 수행했다. 후배들은 선배들이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던 장소에서 그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멀리 어느새 해가 지고 5일차 일정이 마무리됐다.

 

▲출국. 연길공항에서 대한민국으로

5박6일 동북아평화탐방단 활동 마지막 날이 왔다. 아쉬움에 또는 활동 기록지를 적으며 잠을 설친 학생들이 많았다. 피곤함과 함께 학생들은 그 며칠 사이에도 성장한 듯 보였다. 공항 앞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는 그때 연길공항 전광판에는 ‘여러 민족은 석류씨처럼 알알이 굳게 뭉쳐아 합니다’는 한글과 중국어 문구가 나오고 있었다.

각각 학생들은 이곳에서 어떤 꿈과 미래를 만나 조국으로 돌아갔을까. 그리고 한 여학생이 던졌던 질문, ‘나라면 그때 독립운동을 했을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함께한 교사들 마음속에서도 메아리쳤다.

 

▲비행기는 조국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배우는 평화와 역사'를 주제로 올해 3월 시작한 ‘2019 동북아평화탐방단’ 7개월 여정이 9월28일 탐방단 해단식과 10월 결과보고서 제출을 끝으로 종료됐다.

마지막 단체촬영에서 학생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손 모양을 하며 “피스”를 외치거나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이날 대표로 소감을 발표한 운남고 이수영 학생은 “압록강에서 중국 동포(조선족학교 학생)들과 북한을 조망했고 멀리서 북한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고기를 잡는 북한 어부를 향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자 웃으며 반갑게 화답을 했다.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에 깊은 전율을 느꼈다”며 “통일을 위해서 중국 동포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 동포들과 힘을 모으는 등 온 겨레가 화합‧연대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고 말했다.

또한 “중국 동포들도 국적이 중국이기에 중국 문화대로 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학생들과 너무 같아 놀랐다”며 “k팝 한국 화장품, 한식 등 문화가 같고 언어도 같았다. 헤어질 때는 아쉬움에 눈물이 났고 쉽게 다시 못 본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더 컸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탐방단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돼 많은 친구들이 함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단상에 오른 대성여고 김어진(2) 학생은 “일본군731부대죄증전시관에선 어디서도 일본어가 들리지 않았다. 중국인과 한국인들만 시야에 들어왔다”며 “독일 정부가 과거를 반성하고 교육 과정에 아우슈비츠 방문을 필수로 하듯이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죄증전시관 등을 방문하고 배울 것을 장려해야 한다. 저도 동북아 평화를 위해 청소년 기자로서 더 관심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해단식을 마지막까지 함께한 장휘국 교육감은 “이 지역(동북3성)은 우리 선배들이 일신상의 안위를 버리고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싸웠던 지역”이라며 “지금 그 현장을 둘러보며 선조들의 의로움과 기상을 배워서 민족의 정체성과 나라의 날아갈 바,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여러분들이 참 든든하고 자랑스럽다”며 “영어 단어, 수학 문제 하나 덜 풀었더라도 이 시간이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마음에 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 평화는 동북아 평화의 전제 조건이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동북아 공동의 노력이 필수적”이라며 “여러분들이 중국의 한민족 청소년들과 함께 한 교류의 시간들은 동북아평화공동체를 위한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우리민족 김영록 이사장은 “우리의 역사를 옳게 인식하고, 그 역사의 순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다가오는 새로운 미래와 역사를 열어갈 수 있다”면서 “분단의 아픔과 평화와 통일, 그리고 한민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길 바라며 작은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여러분 마음속의 작은 통일의 불씨가 모여 하루빨리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고 말하며 해단식을 마무리했다.

/글 정리 차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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