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및 논설

마을 언니들이 피운 꽃[미래교육신문 김미수필]

교육정책연구소 2023. 3. 22. 09:17

김    미

농사일을 마무리한 마을 언니들이 농한기를 맞아 마을 회관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간식거리가 있으면 머리를 맞대고 먹으면, 맛을 평가하고 또 방바닥에 누웠다. 요즘 언니들이 집에서 들고 오는 간식거리는 쑥떡, 고구마, 호박이다. 지난봄 뜯어말린 쑥으로 미리 쑥떡을 해 자녀들 몫은 택배로 먼저 보낸 후 나머지는 돌아가며 가져와 먹는다. 은자 언니는 두 아들이 있는데 결혼 할 때 쓰려고 몇 년에 걸쳐 쑥을 뜯어 모았다. 혹시 한 해에 두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될까 싶어 뒤채 창고에 말린 쑥을 이불처럼 차곡차곡 자루에 담아 두었다. 서울에 있는 두 아들 나이는 해를 거듭 할수록 높아 가는데, 좀체 결혼할 기미가 없었다. 동네에서는 제일 나이 많은 노총각 이름에 올랐다. 동네사람들도 은자 언니 앞에서는 손주 자랑을 참는다. 올봄에는 그 많은 쑥을 다 팔아 버렸다. 그것도 헐값으로 방앗간 주인은 땡잡았다고 자랑이더란다. 은자 언니 속도 모르고. 그 누구도 은자 언니한테 아깝게 왜 그 공들인 쑥을 거저 준 거냐고 말 한마디도 못했다.

맛있게 먹은 후 몇 사람은 성치 않은 몸으로 설거지하면 나머지는 상 물린 자리에 거침없이 몸을 눕혔다. 대문 곁에 백구가 해바라기를 하듯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회관 언니들이 늘 해 오던 이야기가 기나긴 겨울을 나고 나니 동이 났다. 해묵은 이야기도 몇 번을 되풀이했다. 듣고 또 들어도 껄껄대고 웃었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그 모습이 일시에 번지는 웃음꽃 같다.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후덕했던 덕자 언니는 이 자리에 없다. 가을일을 마치면 아들들에게로 갔다. 덕자 언니는 한겨울은 서울에서 보내고 봄이면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째 서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분명 소식이 없는 덕자 언니의 안부가 안 궁금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 더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될까 불안해 조심 중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이야기가 궁색해지면 덕자 언니 안부가 궁금하지만 참았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 모으면 화투나 남의 흉을 본다지만, 우리 마을 언니들은 그런 일은 없다. 화투는 해 봐야 공염불이며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몸이라도 편안히 쉬는 게 이익이라는 지론이다. 그렇다고 남의 흉보기는 더 금물이다. 괜히 남의 흉보다 보면 나 없을 때 내 흉보기 마련이란다. 서로 남의 흉허물 들어내지 말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싸움 대장에 흉보기 선수들이었다. 젊어 한때는 남아나는 기운을 싸우고 노는 데 허비했다. 날이 궂어 일손이 한가하거나, 삼복더위에 그늘 밑에서 쉴 때는 누가 이 말을 했는지, 근원지를 찾아 시비를 가리는 일로 바람 잘 날 없었다. 언니들이 기력이 쇠하고 기 싸움을 해 봐야 인생에 도움 될 것이 없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했다. 웬만한 일에는 입단속 하는 자세가 인생 득도한 수도자들의 태도다.

언니들은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귀여운 짓이려니 여긴 탓인지 잘 호응했다. 사실은 나 역시 노령 연금 받을 시기가 가깝다.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만 아기 취급한다. 그래도 싫지 않다. 심심하면 마을 회관으로 재롱을 피우기 위해 찾아가곤 했다.

어제 유튜브를 보던 중 바나나를 다른 식재료와 반죽해 피부에 바르면 회춘한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나 혼자만 아기 피부가 되는 것보다 우리 마을 언니들이 모두 다 피부미인이 된다면 마을에 경사가 될 것 같았다.

재료들을 들고 마을 회관으로 달렸다. 몇 분 후에 일어날 변화에 언니들의 표정을 상상하니 기쁨이 충만했다. 큼직한 바나나 몇 송이와 냉동실에 있는 곡물가루를 혼합한 후 당분을 첨가해 대형 믹서기에 몇 번에 걸쳐 갈았다. 그 양은 질릴 만큼 많았다. 생각보다 언니들의 반응은 안 바른 것보다야 더 낫겠지, 하는 듯했다. 멀뚱히 보거나 누워 이야기를 나누거나 주방 바닥을 훔치고 있었다.

내 성의를 무시할 수 없음인지 주방에서 설거지하던 언니들은 마지못해 비닐 팩에 담았다. 설마 부족하겠냐 싶어 대충 나누다 보니 가장 아랫목에 누웠던 90목 전에 둔 왕언니들 몫이 부족했다. 팔십 대 언니들은 눈을 껌뻑거리며 “저기 노인들이야 바르나 마나 할 모양이니 그냥 나누고 끝내자.” 했다. 그 소리에 아랫목 왕언니의 목소리는 천둥 벼락 내리지는 소리였다. “젊은것들은 안 발라도 기름기가 번들거리지만, 늙어보니 얼굴 피부라고 해 봐야 소나무 껍질 같구먼.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것들이네,” 하며 화를 벌컥 냈다. 주방에서 나누던 70대 언니들은 몸을 움츠렸다. 다시 재료들을 준비해 꼭 같은 양으로 나누었다. 어떻게 발라야 하고 언제 발라야 효과가 좋으냐며 질문이 쇄도했다.

나는 순간에 피부 관리사 역할을 해야 했다. 아예 시범을 보이라며 87세 언니가 누웠다. 기왕이면 뜨거운 방바닥에 모두 누우라 했다. 70대 언니들은 80대 이상 언니들 얼굴에 고루 펴 발랐다. “이걸 어째, 주름이 고구마 밭두렁이네.”라는 말에 한바탕 웃음바다로 변했다. 언니들은 “아기들아 누워 보게. 이번에는 언니들이 발라줄게” 했다.

졸지에 마을 회관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주방에서부터 거실 안방 세 곳은 얼굴에 부적을 붙인 아프리카 부족들이 주술로 기원을 꿈꾸는 모습이었다. 마냥 행복해 보였다.

행복이란 화려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 마음을 헤아려주고 보듬어주는 마음이다. 웃어주는 포근함 하나면 완성되었다. 내일이면 우리 마을 피부미인들이 오일장으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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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언니들이 피운 꽃

김 미 농사일을 마무리한 마을 언니들이 농한기를 맞아 마을 회관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간식거리가 있으면 머리를 맞대고 먹으면, 맛을 평가하고 또 방바닥에 누웠다. 요즘 언니들이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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